오월의 문화위상학을 위하여 - 전동진(전남대 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날짜 2020-12-04 조회수 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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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문화위상학을 위하여

 

전동진(전남대 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2016년 노벨물리학상 시상식에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추천위원이 노벨물리학상 수상의 정당성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서 들고 나온 것들이 전혀 물리학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운데 구멍이 없는 도넛, 프레첼빵, 베이글, 머그컵을 들고 나왔다. 노벨물리학상의 바탕이 되는 ‘위상 수학’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물질적 속성으로 보면 설탕 묻은 도넛과 프레첼빵, 베이글이 유사하다. 그리고 머그컵과 도자기 컵이 속성이나 쓰임에서 같다. 그런데 위상수학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위상 수학은 품고 있는 공간을 통해 사물의 유사성을 파악한다. 설탕 묻은 도넛은 0hole, 프레첼 빵은 3hole, 베이글은 1hole, 머그컵은 1hole, 도자기 컵은 0hole이다. 베이글과 머그컵이 위상적으로 동일하고, 도자기 컵과 설탕 묻은 도넛의 위상이 같다. 다음 사진을 보면 이해를 도울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NlqYr6-TpA&t=23s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광주의 지명, 위치를 나타낼 때도 동서남북을 붙인다. 남광주, 동광주, 서광주, 북광주라는 말을 쓰지만, 공식적인 지명은 아니다. 그런데 남광주는 북광주나 동광주, 서광주와는 또 다른 의미의 장을 펼친다. 뒤에 있는 것들은 주로 방향을 나타내는 데 쓴다. 반면 ‘남광주’는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인 범주, 영역이 있다. 남광주 시장, 남광주역, 남광교, 전남대병원, 남광주 고가도로 등이 남광주를 이루는 주요 공간 요소들이다.


 도심을 오랜 시간 쾌적하게 걷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가능한 곳이 광주다. 150만이 사는 대도시의 공원 중에서 광주의 푸른길공원은 그 길이로는 단연 세계에서 으뜸을 자랑한다. 거의 10Km에 달하는 푸른길 공원의 중간에 해당하는 지점이 옛 남광주역 자리다.
 

 남광주역에서 양림동쪽으로 광주천을 건너는 푸른길공원길 다리 위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면 진풍경을 목도할 수 있다. 광주천의 물길을 따라 천변좌로와 우로로 자동차가 달린다. 그 아래 광주천변 양 옆으로 사람들이 걷고, 자전거가 달린다. 아시아문화전당 쪽으로 보면 옛 전라선의 자취를 안은 철길이 있다. 뒤돌아서 올려다보면 남광주 고가도로가 있고, 그 아래 놓인 것은 남광교다. 물면으로는 광주천을 건너는 징검다리도 놓여 있다. 그리고 얼마 후면 물밑으로 지하철 2호선이 지나게 된다. 한 자리에서 이렇게 많은 길을 목도할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신기할 정도다.


 광주는 세계 문화중심도시를 표방했다. 경주에 비하면 유형무화유산은 턱없이 부족하고, 무형유산은 전주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도 가슴 뿌듯하게 세계 문화중심도시를 표방했다. 과거에서 온 문화유산으로 치면 광주는 한국의 문화중심도시로도 부족함이 많다. 광주는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열흘 동안 인류가 경험해 보지 못한 전대미문의 공동체를 열었다. 이것은 불가능의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던 꿈의 공동체였다. 광주가 세계 문화중심도시가 될 수 있는 것은 과거에서 온 문화유산이 아니라 바로 이 ‘열흘의 공동체’라는 미래에서 온 문화유산 덕분이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가 턱없이 부족한 명칭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광주는 아직 아시아문화중심도시에도 턱없이 못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개시된 ‘열흘의 공동체’를 과거의 사건으로만 붙들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본다. 최정운 교수는『오월의 사회과학』(풀빛, 2005)에서 이렇게 말한다.

 

5·18이 우리 근대사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갖는 의미의 핵심은 이 절대 공동체의 체험일 것이다.

그곳에는 사유재산도 없었고 목숨도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었고 시간 또한 흐르지 않았다.

그곳에는 중생의 모든 분별심이 사라지고 개인들은 융합되어 하나로 존재했고 공포와 환희가 하나로 얼크러졌다.

그곳은 말세의 환란이었고 동시에 인간의 감정과 이성이 새로 태어나는 태초의 혼미였다.

그런 곳은 실제로 이 땅에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¹


 과거의 사건으로서 5·18과는 전혀 무관한 최정운 교수와 같은 이들에게 미래의 5·18을 맡겼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80년 광주에서 ‘미래’를 보았던 이들은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크게 환대받지 못했다. ‘지들이 한 게 뭐 있어?’라는 말을 뒤통수로 흘려들으며 쭈뼛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광주로 모여 들었던 미래의 문화 주역들은 대개 떠나왔던 자리로 되돌아갔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발길을 끊었다.


 빅터 프랭클은 나치의 수용소를 세 군데나 옮기면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이자 빈의 제3정신의학이라고 칭하는 로고테라피를 창안한 의학자이다. 그는 죽음과 직면하는 순간마다 삶의 의미를 찾아 스스로를 미래로 기투해 나갔다. 그는 특별한 ’개인‘을 성취할 수 있었다. 80년 오월 열흘의 공동체를 이룬 시민, 시민군들은 ‘삶의 의미’가 아니라 ‘죽음의 의미’를 찾음으로써 전대미문의 공동체를 열었다.


 5·18은 100만이 가까운 대도시에 공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질서를 유지한 전대미문의 ‘공동체’를 구성했다. 이러한 공동체는 인류가 그 가능성조차 쉽게 발설할 수 없을 만큼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미래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우리는 과거에 발목을 잡혀준다. 빅터 프랭클은 나치 수용소 세 군데를 옮기면서도 기적처럼 살아남은 이야기를 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청아출판사, 2017)에서 이렇게 말한다.

 

미래의 목표를 찾을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수감자들이 공포로 가득 찬 현재를

덜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과거를 회상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²


 어떤 시대든 그 시대 나름의 집단적 신경증은 있었다. 그리고 나름의 치료책이 있었다. 실존적 공허가 주를 이루는 집단 신경증은 개인의 허무주의에서 비롯한다는 점에서 존재 자체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으로 흐르기도 한다. 실존적 공허에 의한 허무주의나, 허무주의에 의한 실존적 공허에서 동시에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라고 프랭클은 덧붙인다.

 

 이렇게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할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³


 80년 광주에서 열린 열흘의 공동체를 ‘과거의 사건’으로 규정하면, 피해자 담론이나 보상 담론, 처벌 담론 등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열흘의 공동체’는 앞서 말한 것처럼 인류사에서 구현된 적도 없었고, 구현될 가능성도 거의 불가능한 공동체였다. 80년 오월 광주에서 열흘 동안 열린 전대미문의 공동체를 ‘미래의 사건으로 전회’할 때, 우리는 이 공동체를 목적으로 삼아 새로운 가치를 지향할 수 있다. 그 과정 자체에서 우리는 다채로운 의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열흘의 공동체’가 우리의 목적으로서 미래의 사건으로 자리하면 우리는 범결정론적 태도에서 벗어나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프랭클의 말이다. “인간은 조건 지워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⁴

 

 

<남광주를 흐르는 광주천 징검다리에서 올려다본 다리들>

 


남광주에서 광주천을 따라 걸으면 전라선철교, 푸른길공원다리, 남광주고가다리, 남광교, 징검다리를 한꺼번에 만나게 된다. 광주천을 건너는 다리도 이렇게 한 자리에 5개가 놓일 수 있다. 오월은 과거로에서 흘러오는 도도한 역사의 강만이 아니다. 미래에서 흘러오고 있는 세계사적인 문화의 강이기도 하다. 그 강을 건너는 데는 오직 하나의 길뿐이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는 이들의 목소리가 여전하다는 소식이 들린다. 멀리에서 하염없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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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풀빛, 2005, 99-100.

2) 빅터 프랭클, 이시형 옮김,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2017, 129-30쪽.

3) 빅터 프랭클, 같은 책, 131-2.

4) 빅터 프랭클, 같은 책,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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