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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감각 '쇼핑' 제안서
한순미(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결단의 감각
보이지 않는 것의 위력을 체감하고 있다. 찰나의 겨를조차 잃어버린 하루, 계절의 변화에도 무심한 표정들이다. 전염의 공포가 지배하는 동안 안부를 묻는 일은 아무런 감각이 없는 습관적인 말이 되었다. 사람들 사이의 간격을 멀리할수록 서로의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방역 수칙 아래,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함께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안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일상, 도시, 거리, 문화, 예술, 공동체 등 익숙한 용어들은 거의 강제적으로 이전과 다른 개념으로 재탄생하길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
문화예술을 감상하는 패턴에도 변화가 생겼다. 전시회, 공연장, 영화관 등 현장을 직접 찾아가던 발걸음 대신에 온라인 디지털 공간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수집하고 선택하는 일이 잦아졌다. 어디에 접속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그냥 쇼핑만 하고 지나칠 때도 적지 않다. 문화예술 프로그램들을 접할 기회는 많아졌는데 빈 장바구니를 볼 때처럼 박탈감을 더 많이 느낀다. 이것 또한 물건을 선택하고 구매해서 소유하는 일련의 과정을 쇼핑이라고 생각해 왔던 기존의 문화예술 감상 형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문화예술 쇼핑 목록들 중에서 접속 경로를 따라 구매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컴퓨터 기억저장소에는 디지털 쓰레기들이 축적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팬데믹의 재난은 다른 감각의 사용을 제안한다. 돈을 지불하고 구매한 입장권을 가지고 전시장으로 들어가는 일련의 ‘선택’ 과정 대신에 언제든지 접속을 시도할 수 있고 접속을 끊을 수 있는 ‘결단’의 감각을 새롭게 체득한 것이다. 이 결단의 감각은 생각, 의지, 마음이 하는 일과 다르게 일종의 놀이와 같은 행위다.
“정크스페이스(Junk-space)”
지구는 점점 인간들이 내버린 쓰레기들로 거의 호흡이 정지된 상태다. 인류의 역사는 곧 쓰레기를 축적해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지구의 지층에 남긴 인류의 흔적들로 인해 새로운 지질시대에 도달했다는 의미에서 ‘인류세’라는 용어가 유행하고 있는데 그것이 기후변화, 전염병 등 재난의 연쇄적인 출현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라는 분석이다.
쓰레기는 재난 시대를 표시하는 가장 구체적인 사물이다. 폐품이나 쓰레기를 재활용한 정크아트(Junk Art)에서 예술의 소재로서의 쓰레기와는 다르게 쓰레기를 사유하는 이론가들이 있다. 네덜란드 건축가 렘 콜하스는 “정크스페이스(Junk-space)”라는 용어를 “우리가 이루어낸 모든 것의 총합이다.”(10쪽)라고 표현하면서 그것을 도시 풍경을 바꾸어버린 하나의 원리로 설명한다. 렘 콜하스의 에세이 ‘쇼핑 안내서’를 다시 읽은 프레드릭 제임슨은 “쇼핑”을 이렇게 재정의한다. 즉 “쇼핑은 하나의 공연이다. 돈과는 상관없는 공연이다. 중요한 것은 적당한 공간이며, 그 공간이 바로 정크스페이스인 것이다.(93쪽)(렘 콜하스‧프레드릭 제임슨, 임경규 옮김, 『정크스페이스/미래도시』, 문학과지성사, 2020.)
그러니까. 우리의 삶 자체가 쇼핑의 대상이자 목적이다. 산다는 것은 곧 쇼핑하는 것이고 공연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쇼핑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며 아무것도 살 수 없다고 해도 우리에게 부족한 것, 없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살 수 있다. 쇼핑은 ‘바이러스’와 같이 일상에 이미 침투해 들어와 존재의 형식을 결정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과 몸짓, 그리고 도시 자체가 바로 정크스페이스이다.
『정크스페이스/미래도시』의 옮긴이는 다소 난해한 두 사람의 사유와 이론을 다음과 같이 풀어쓴다. “정크스페이스는 모든 도시 공간을 지배한다. 박물관, 공항, 시내, 학교, 병원, 교회, 심지어 뉴스와 방송, 교육, 인터넷까지, 도시와 건축이 쇼핑의 메커니즘에 의해 조직화되고, 모든 공간에 쇼핑의 영혼이 깃든다. (…) 우리는 정치를 쇼핑하고 종교를 쇼핑하고 이데올로기를 쇼핑한다. 쇼핑이 우리가 무엇을 결여하고 있는지 결정하는 것이다.”(<옮긴이 해제: 정크스페이스와 유토피아의 변증법>, 앞의 책, 101-102쪽.)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을 담은 ‘쇼핑 안내서’라기보다는 차라리 재난 목록을 구매하라는 ‘쇼핑 제안서’처럼 읽힌다. 우리는 쓰레기에 갇혀 쓰레기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이 도시 전체가 재난에 처해 있는 것이다. 재난들이 숨쉬고 거주하는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문화예술의 공간과 감각은 이 도시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거리-스튜디오: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 꿈을 꾼다
전시회에 들어가기 위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소수의 사람이 입장한 후 관람할 수 있다. 이제 문화예술의 영역에서는 상상력, 창의력, 감수성만이 아니라 ‘기다림’과 ‘서성거림’에 관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또한 이 텅빈 거리를 새로운 요청을 자유롭게 발언하고, 예술가들의 작업공간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품어본다. ‘거리-스튜디오’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런 장소.
다른 일상을 쇼핑하길 원하지만 결국 일상에 갇힌다. 하지만 그런 암울한 시도들 자체가 새롭게 얻게 된 감각의 형식이다. 문화예술 작업은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을 보고 듣고 만지는 몸짓에서, 일상의 모든 것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의 그물을 던지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돌멩이 하나, 들꽃 한송이, 들고양이, 쓰레기들에도 자주 발길이 머물게 된다면 당신은 이미 재난의 거리를 쇼핑할 준비가 된 예술가인 것이다.
문화예술의 역사는 본래 반란과 거역, 불복종의 역사이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단조로운 일상에 균열을 내고, 작은 혁명의 순간을 만들어온 방법의 역사이기도 하다. 쓰고 또 쓰고, 그리고 지우고 또다시 그리는 그 무수한 시도들. 무의미한 반복 과정에서 얻어낸 한갓 남루한 흔적 같은 것. 어떤 갈망은 동어반복을 통해 완성된다. 쓰레기에 갇혀, 잠시 걸어가야 할 장소와 방향을 상실한다.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 다시 꿈을 꾼다. 전라도 사람들이 걸어온 길과 광주 오월의 거리에 저장된 저항의 역사 기억/기록들이 문화예술 공간을 새로 바꾸는 숨은 힘이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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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한순미는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인문한국플러스사업단(HK+)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동아시아 재난인문학, 한국 근현대 문학, 한센병 역사문화 기록에 관심을 가지고 서사, 트라우마, 치유, 소수자와 타자, 공동체 등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연구 논문은 「나무—몸—시체: 5.18 전후의 역사 폭력을 생각하는 삼각 운동」(2016), 「분홍빛 목소리―한센인의 기록에서 혼종성이 제기하는 질문들」(2017), 「세계를 바라보는 다초점 렌즈로서의 재난(인)문학(2019), 「재난 이후 인문학적 실천: 세월호의 ‘바람’에게」(2020), 「팬데믹 이후 재난인문학」(202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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