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구름편지] 덕분에 나답게 살 수 있었네요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날짜 202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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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나답게 살 수 있었네요

“다정한 참견 : 나의 문화예술교육을 찾아서”를 마치고



임아영(뜬구름편지 편집위원장)


고백하며 시작한다. 2009년, 스물여덟 살에 첫 직장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이하 센터)에 들어왔다. 우리 할머니 말마따나 ‘먹고 대학생’ 시절을 지나, 방송 프로듀서가 되고 싶어서 여기저기 방송국을 기웃거렸지만 줄기차게 떨어졌다. 얇은 가방끈을 길게 늘일 셈으로 대학원에 들어갔고 거기서 ‘문화예술교육’이라는 여섯 글자를 처음 들었다. ‘공교육’과 ‘사교육’은 알겠는데 문화예술교육은 또 무슨 조어인가 싶었다.


뭐 하는 곳인지 몰라서 하라는 대로 했다. 나의 첫 사수, 박형주 팀장님과 여러 사람을 만났다. 여러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 하나같이 뜻대로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남 좋은 일만 골라서 하는, 바쁘고 지쳐있는 사람들을 한 다스씩 마주했다. 그리고 뒤늦게 알았다, 나는 이들을 지원하는 공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내 배부터 불리며 살아야 한다고 삼십 년 동안 보고 듣고 배웠는데, 남 기름지게 하는 일에 집요하게 골몰하는 사람들을, 내가 무슨 수로 돕는단 말인가. 말도 안 돼.


나는 센터에서 교류와 양성을 맡았다. 그러니까 문화예술교육 활동가를 모이게 해서 새 기운을 넣는 일을 했다. 새로운 문화예술교육을 갈망하는 네트워크 ‘새갈래’라는 먹고 떠드는 모임을 한 달에 한 번씩 열었다. 그리고 학교 미술 선생님, 음악 선생님들을 방학 때마다 만나서 연수를 열었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좀 다르게 만날 수 있도록, 바깥 예술가랑 이것저것 몇 날 며칠 해보도록 했다. 내가 하는 일은 한 마디로 중매였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활동가들이 센터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사업계획서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강당에서 공연 연습 좀 해도 되냐, 연구 모임을 하려는데 여기가 좋다, 아니면 그냥 보고 싶어 왔다며 빵이나 귤을 내밀었다. 그즈음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 우리가 이분들에게 필요한가 보다.’ 그리고 나서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을 맡았고 우리는 신나게 현장에 다녔다. 별의별 단체와 기관과 사람들을 만났다. 모니터링하러 가서 발달 장애 어른들과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미혼모들이 그림 그리는 곳에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아찔했다. 만날 이런 사람들만 보니까 배알이 뒤틀렸다. 나는 이렇게 못 살 것 같은데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 주위를 빼곡하게 둘러싸고 있으니 가끔 숨이 막혔다. 도울 자격이 있나. 도울 주제는 되나 싶었다. 나랏돈 받아다 따숩고 시원한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서 전화 몇 통 돌리고 메일 몇 장 뿌리고 고맙단 소리 들어도 되나. 답을 내리지 못한 채 그렇게 육 년이 지났다.


서른다섯 살이 되었다. 센터를 나와 ‘광주청소년삶디자인센터’(이하 삶디)에서 일을 시작했다. 강 건너 불구경은 그만하고 싶었을까. 삶디는 십 대들에게 “꿈이 뭐예요, 꿈을 꾸세요.”라고 사근대지 않고 “내 삶은 내 손으로”를 외치며 망치, 호미, 국자, 붓과 악기를 쥐여 주는 곳이었다. 거기서 또 육 년 가까이 보냈다. 남의 진로에 다정히 참견하다 보니 결국엔 나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나의 자격과 주제를 묻게 됐다. 나는 남의 손을 빌려 살면서 저들 앞에 서 당당할 수 있나. 그렇게 그곳을 떠났다. 살고있는 곳에서 내 몫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렇게 친정아버지에게 포도 농사를 배우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마을교육공동체 활동을 하며 그림책을 읽어주고 축제를 준비했다. 농사짓는 부부들과 더 가까워졌고 마을 도서관에서 기타를 배워 크리스마스 음악회에 서기도 했다. 이제야 비로소 진로를 정했다. ‘글 짓고 농사짓는 시골 할머니 기타리스트.’


스물여덟 얼떨결에 받아 든 ‘문화예술교육’이라는 여섯 글자는 처음엔 그냥 일이었지만 숱한 활동가를 만나면서 그것은 내 삶의 태도가 되었다. 나와 남과 예술을 아끼며 살아가고 싶고, 그렇게 살고있는 분들을 내 코딱지만 한 재주로 돕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러다 센터에서 여는 ‘문화예술교육 서로배움 : 다정한 참견’에 초대받았다. 그리고 활동가들이 사업으로서 문화예술교육 말고 ‘나만의 문화예술교육’을 정의하도록 도왔다. 열 명 남짓한 그들을 환대하고 그들의 일을 긍정하는 그림책을 읽었고, 예술과 이웃에 대한 고백을 쓰게 하고 곁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음악을 하니까, 목공을 하니까, 심리상담을 하니까”가 아니라 “나는 이런 사람에게 눈길이 가니까, 누구를 돕고 싶으니까, 이들이 내게 이런 걸 원하니까”로 문화예술교육을 시작하길 바랐다. 계획서 쓰는 법이나 글 잘 쓰는 법을 원하고 왔다면 이 자리를 빌려 심심이 위로한다.



“나는 이런 사람에게 눈길이 가니까, 누구를 돕고 싶으니까, 이들이 내게 이런 걸 원하니까”로 문화예술교육을 시작하길 바랐다.   



십오 년 전에는 사직공원에 있던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에서, 그리고 지금은 삼서면 유평리에서 나는 여전히 문화예술교육 활동가인 당신을 마음 다해 응원하고 있다. 부지런히 쓰고 떠들면서 받았던 사랑을 할부로 갚아나가는 중이다. 여기 다정한 참견을 앞두고 참여자들에게 보냈던 편지글과 그들에게 드렸던 질문지를 동봉한다. 내년에도 굳이, 뜯어말려도 기언치 문화예술교육을 할 참이라면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프린터에 전원을 넣고 요놈을 뽑아 꼭 연필로 적어보길 바란다. 마침내 ‘나의 문화예술교육’을 정의할 수 있길 바란다.


“올해도 여러분 덕분에 나답게 살 수 있었네요.

고마워요.”



                                                                                                                                                                                마침내 ‘나의 문화예술교육’을 정의할 수 있길 바란다.



✉ 안녕하세요. 아봉이라고 해요.
이름은 '임아영'인데, 임아영으로 불리면 임아영이 지닌 성격, 취향, 능력만 가지고 살고 말아 버릴 듯해서요.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며 살아야겠다고 어렴풋이 맘먹었을 때, 정확히 말하면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를 그만둔 서른다섯 살부터 '아봉'이라는 어릴 적 별명을 일터와 삶터에서 쓰고 있어요. 임아영은 주위 사람들이 알고 있고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아봉은 내가 바라는 나라고 봐야겠네요. (아봉은 스무 살에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인데요. 몇몇은 '아몬드봉봉'의 줄임말이냐고 묻기도 해요.)


만나기 사흘 전이네요. 한 날 한 시에 한 자리에서 만나는 인연이 신기하고 반가워서 띄우는 편지이고요. 단 몇 시간을 만나더라도 제대로 마주하고 싶은 마음에, 다음 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어떤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을 어떻게 할지 알리고 싶었습니다. 특히 '우리가 왜 만나야 하는지'에 대해 꼭 말씀드려야 해요. 혹시나 해서 말이죠. 어디에 내밀어도 합격하는 기획서 쓰는 법이나 한강처럼 노벨문학상 타는 작가가 되는 법을 기대했다면 여기 말고 다른 데 가셔야 해요. (근데 돈만 날릴 거예요. 나아지고 싶다면 그냥 오늘부터 매일매일 일기를 쓰세요.)


먼저 "다정한 참견"을 기꺼이 허락한 여러분에게 고맙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잔소리, 그러니까 참견이라면 지긋지긋하지만 "다정한" 참견은 반갑습니다. 앞에 있는 사람을 진심으로 위해야 다정할 수 있잖아요. 저는 어찌하다 보니 문화예술교육하는 분들을 말과 글로 응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요. 참견은 쉽고 깔끔하고 돈까지 되지만, 다정한 참견은 어렵고 따분하고 내 시간과 돈을 들여야 가능하더라고요. 심사, 컨설팅, 모니터링 등이 단박에 평가하는 것이 참견이라면, 먹고 마시며 나누는 하소연이나 인터뷰 그리고 여러분과 만나는 이런 자리가 제겐 다정한 참견입니다.


어찌 보면 문화예술교육도 다정한 참견이겠네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다정하게 말 걸잖아요. "이거 한 번 해보자. 뱃속 느낌과 생각을 세상 밖으로 꺼내자. 이곳은 안전하다. 당신 이야기를 들려달라. 당신의 이야기가 곧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이렇게요. 여러분이 예술로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이런 거 맞죠? 하지만 "나는 이런 이유로 누굴 위해 어떤 일을 어떻게 하고 있어(혹은 하고 싶어)"라고 똑 부러지게 말하거나 써내기 어렵고, 나아가 이게 문화예술교육이 맞는지도 모르겠나요? 보름 전에 만난 한 분이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나는 문화예술교육을 할 자격이 없나 봐요."
문화예술교육은 무엇이고, 또 문화예술교육을 할 수 있는 자격은 또 무엇일까요. 그림을 배웠으니 그림을 가르치고 무용을 전공했으니 춤을 알려주면 문화예술교육일까요. 문화예술교육사 자격증을 따고, 삼 년 넘게 지원사업에 참여하고, 소외계층을 위해 일하면 할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문가들의 충고, 조언, 평가, 비판은 설익은 밥 같아서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질 않고, 그렇다고 어디 물어볼 데도 마땅치 않은 채로 어김없이 새해는 밝아옵니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면 답은 나에게 있어요. 내가 찾아야 해요. '나의 문화예술교육'을 내가 정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일과 삶은 내 것이니, 스스로 정의 내릴 수 있어야겠지요. 하지만 참 어렵더라고요. (저도 못 하고 있어요. 끄응.) 그래서 시간 내고 마음 내서 모였으면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나의 일을 말하고 쓸 수 있게 돕고 싶고요. 그래서 강의를 들으러 오는 게 아니라 뱃속에 꽉 들어찬 생각을 토해낼 마음먹고 오셨음 해요. 아침밥 든든히 잡숫고 좋아하는 펜을 들고 온다면 좋겠네요. 오랜만에, 어쩌면 처음으로 내 말을 들어주는 자리인 '나와 나의 인터뷰'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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