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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이브에 보내는 편지
화평한 세계를 그리는 예술가 채성태를 만나다
천윤희 / 뜬구름편지 편집위원
선생님!
1.
올해 초 선생님을 뵈었을 때, “안녕하세요. 잘 계셨어요? 오랜만이지요.”라고 인사를 드렸더니 오랜만에 숨 고를 시간이 서로에게 주어졌는지 선생님께서는 마주 보고 짧은 시간에 여러 말을 쏟아내셨어요. 뚫어지게 쳐다보는 선생님의 시선을 감당하며, 빠르게 쏟아내는 말을 귀담아야 했어요. 급하고도 중요한, 해야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어요. 산 밑 동네에 방앗간을 내었다고, 할매들이 이것도 저것도 필요하다고 해서 하나둘 하다 보니 참기름도 짜고 고춧가루도 빻고 떡도 만들었다고, 방앗간 때문에 너무 바쁘다고 했어요. “내 떡 한번 해주어야 하는데….”라면서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고 하셨어요.
그곳으로 이사하고 나서 몸과 마음이 매우 아파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적이 있다고 했어요. 동네 할머니들이 오고 가며 냉장고에 반찬 해 넣어주고 죽 끓여주고 약 사다 주고 해서 자신이 살아났다고 했어요. 차마 왜 아팠냐고, 그렇게 많이 아팠냐고 묻지 못해 머뭇거리는데, 혈육은 아니지만 오래 자식처럼 돌보던 아이를 보내고 이어 어머니를 보낸 뒤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고, 공황장애가 와서 숨도 쉬기 힘들었고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고 했지요. 지금은 좋아졌다고 했고요. 그 말에 뭐라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끄덕, 속으로 ‘어떻게 견디셨어요. 어떻게?’라고 질문했지요.
사는 게, 살아내는 게 이토록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데 삶의 소망이 보이지 않는 때를 갓 지난 선생님을 찾아가 ‘문화예술교육’을 말하려고 했네요. 아직도 선생님께 문화예술교육이 의미 있나요? 문득 이 모든 게 너무 사소하고 허망해 보여요. 가난한 아이들과 장애인과 성매매 여성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위한 문화예술교육을 하다가 살던 동네를 재개발하면서 그곳을 떠나 들어온 이곳에서 선생님은 안녕한가요?
2.
요 며칠, 날이 너무 추워요. 편한 삶에 익숙해진 제 몸은 냉기에 몸살이 올 것 같아요. 그리고 지난번 선생님을 찾아뵌 날 방앗간과 간판 없는 가게에서 느꼈던 냉기가 바로 떠오르네요. 더 아프시지 말아야 할 텐데요.
오늘도 새벽에 가게 불을 켜고 겨우내 버려진 화분들에게 말 걸고 물 주고 음악을 틀어두고 있을 선생님을 상상해요. 어느 날 동네 도로에 화물 트럭들이 줄줄이 서 있는 걸 보고 ‘새벽에 일 나가는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다가 일일 노동자들, 화물 운전자들이 들으라고, 세수하는 듯 정신 나라고, 음악을 틀기 시작했다고 단지 그것뿐이었다고 말했잖아요. 시간에 따라 오가는 사람들이 다르길래, 아침에 시간대별로 나름 선곡하여 음악을 틀었다고요. 간판도 없는 어느 공간에서 불을 켜고 매일 음악을 틀어주니, “여기 뭐 하는 데에요”라며 한 명 두 명 들어왔고요. 하루는 깜빡하고 음악을 틀지 않았더니 “왜 오늘은 음악 안 틀었냐”라고 누군가 물었다고 했지요. 그렇게 이곳은 차를 덥히면서 잠깐 머무는 대기소이자 쉼터가 되었다고 했어요.
전주 서서학동에 있는, 초록초록 식물 가득한 간판 없는 가게 '문화공간 싹' ⓒ청춘기획라이브온
3.
이쁜 초록 초록 화분들은 잘 있나요? 간판도 없는 가게에 들어갔다가, “와!”하고 함성을 질렀지요. 여긴 온실인가요? 꽃집인가요? 바깥세상과는 너무도 다른 환상 공간이었어요. 천장, 벽, 바닥이 온통 식물로 장식되었어요. 겨울에 이토록 건강하고 생생한 초록이라니, 눈과 마음이 행복했네요. 요맘때 이집 저집 화분을 많이 버리고, 그것들을 주워와 버려진 폐가구, 재활용품을 써서 다시 심고 살려낸다고요. 이쁘게 키우니 갖고 싶어해서 어르신들에게 다시 선물하고 있다고 했고요.
동네에 혼자 사는 어르신, 장애인 등이 많고 아예 출입도 안 하고 사는 분들도 많다고 했잖아요. 쓰레기랑 같이 살고 환기를 하지 않아 냄새 나는 곳도 더러 있고요. 그래서 선생님이 그런 집에 화분을 들고 가서 빛과 바람이 드는 곳을 찾아서 두었다고 했죠. 식물 하나만 들어왔을 뿐인데 달라진 집 안 분위기와 매일 자라는 모습에 감탄하며 식물과 말벗하는 어르신들이 눈에 선하네요. 어떻게 환기해야 좋은지, 내 몸에 건강한 공간은 무엇인지를 바지런히 알려주셨다고 했는데 그러면 사람이 달라지잖아요.
그래요, 그게 선생님의 그림이지요. 청소하고 나면 기분이 달라지듯이 일상을 달라지게 돕는 일이 선생님의 작품이겠지요. 어르신을 어떻게 방 안에서 움직이게 할 것인가를 상상하고 계획하다가 식물과 사람을 연결하니 이어서 자연스레 다양한 일이 줄줄이 일어났다고 말씀하셨지요. 식물을 나누니 떡이 오고, 밥이 오고, 약이 오고, 어느 날엔 드디어 집에만 계시던 할머니가 밖에 나왔다고 했지요.
청소하고 나면 기분이 달라지듯이 일상을 달라지게 돕는 일이 채성태 선생님의 그림이자 작품이다 ⓒ청춘기획라이브온
4.
뒷산 조그마한 땅에다 농사지으며 거기 앉아있는 게 선생님의 가장 큰 기쁨이라고 하셨지요. 젊은 남자가 하도 그곳에 앉아있으니까 어르신들이 걱정하고 궁금해할 법도 하죠. 그때 선생님은 궁리 중이었잖아요. 땅을 실험실 삼아서 말이죠. 처음엔 쓰레기 매립지였기 때문에 쓰레기를 다 파내서 밭을 만들고, 동네 사람들과 수확을 나누고, 거기서 난 식재료를 방앗간에서 가공해 팔고, 이어서 카페 음료 재료로도 썼지요. 할머니들이 자꾸 땅을 맡겨서 힘들어 죽겠다는 말이 이해되네요.
“빚내서는 안 합니다.”라는 선생님 말에 안도했어요. 지원금도 월급도 나오지 않으니 저의 좁은 세계관에서는 ‘선생님도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하지’하며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그 또한 저의 어리석음이었네요. 모든 실험은 연결되어 있고, 자립하고 수익을 내는 방향으로 연구하고 있으니까요. 작년에 심은 모종이 알고 봤더니 매우 비싼 식물이라고…. 서울 양재 꽃시장에 비싼 값에 팔 수 있다고 알게 된 후로 종류별로 키우고 있다고 하면서 값을 알려주셨는데 그 식물이 정말 달리 보이더군요.
방앗간도 올해는 실험하는 한 해로 보내면서 여러 재료로 실험하고 기술을 습득하는 데 몰입하고 있다고 했지요. 어떻게 하면 고춧가루를 잘 빻아볼까 연구하다 보니 품질이 소문 나서 먼 데서 트럭 가지고 오고, 참기름과 떡도 인기가 좋다고 했어요. 직접 키운 여러 작물을 건강한 먹거리와 건강한 삶을 바라며 사용했더니 반응이 좋다고 했지요. 그래요, 선생님. 사람은 건강히 먹고살아야 해요. 그러기 위해선 돈과 일자리가 필요하고요. 지원받는 구조에서 탈피하여 스스로 자립하고 자급자족하는 삶을 구상해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해요. 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니 사업을 하면서 일자리를 만들어 주민과 함께 삶을 영위하고 싶다는 구상이지요. 간판 없는 가게는 카페로 만들어 주민이 운영하되 밭과 방앗간에서 재료를 마련하고 또 식물도 키워 팔고, 방앗간도 분야를 나눠 여러 주민이 사장이 될 수 있도록 하고요.
5.
“둘러보면 사방에 보물 천지다.”라고 말씀하셨지요. 다만 잘 보이지 않을 뿐이겠죠. 선생님에게는 숨어있는 보물을 보는 특별한 힘이 있나요?
“일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보물도 달라져요. 무심히 지냈던 공간에 대해 곰곰이 궁리해보면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라는 느낌이 들면서 희망이 생기더라고요. 아이든 어른이든 버려진 것을 좋게 바꾸면 나도 집에서 해보고 싶고, 그렇게 시도했을 때 희열을 느끼죠. 그 감각이 중요해요. 이것을 맛보면 다음을 또 계획하더라고요. 사람들에겐 그런 힘이 있어요. 근데 안 해봐서 깨닫지 못할 뿐이지요. 나는 그게 문화예술교육의 힘이 아닐까 싶어요. 상관없던 사물을 다르게 쓰면서 자기 삶에 연결할 때, 삶도 조금씩 변할 수 있어요. 그게 문화예술교육이라고 생각하고요.”
선생님의 삶터를 잠시 들여다보고 오며, 나는 선생님이 성직자 같다 느꼈어요. 성직자가 신에게 받은 소명을 따라 사는 것처럼 말이죠. 누구도 그걸 하라고 등 떠밀지 않았는데, 선생님은 가난한 어린이, 장애인과 그 가족, 성매매 여성과 그 가족,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어르신에게 말을 걸고 손을 내밀었어요. 선생님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그곳 사람들이 본래 가진 것과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찾도록 도와주며 살고 있지요. 미술을 전공한 선생님은 자신을 “세계를 캔버스 삼아 그리는, 모두가 화평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리는 예술가”라고 했어요. 그게 선생님이 말하는 문화예술교육이라 했지요. 그래요. 화평한 세계를 그리는 예술가.
사물을 다르게 쓰면서 자기 삶에 연결할 때 삶도 조금씩 변할 수 있어요. 그게 문화예술교육이라고 생각하고요 ⓒ청춘기획라이브온
근데 말이죠, 선생님. 작디작은 세계를 겨우 살아가는 저는, 다른 누구보다 선생님이 먼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안녕했으면 좋겠어요. 아프지 않고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오래 보고, 또 만나 후배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은 우리에겐 선물 같은 보물이니까. 스스로를 아끼고 잘 돌보았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을 생각하듯, 안전 기지 같은 좋은 사람이 곁에 많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오늘도 고마워요. 선생님이 계셔서 참 좋아요. 메리 크리스마스!
p.s 탱자엑기스차 참으로 약이네요. 고춧가루와 떡, 참기름도 잘 먹고 있어요!
*이 글은 문화예술교육하는 채성태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우성방앗간과 간판없는 가게에서 나눈 대화를 기반으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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