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도 교실붕괴와 이지메가 이웃나라 일본의 이야기로만 알려진 때가 있었다. 하지만 IMF 이후 학교폭력은 늘어만 갔고, 이제는 학생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일도 학교의 주된 역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교육청 부서의 명칭이 ‘학교안전생활과’라는 사실도 우리 교육의 부끄러운 단면을 보여준다. 예나 지금이나 몇몇 ‘섬바디’를 제외한 대부분의 ‘노바디’들은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한 채 학교를 오가고 있지만, 예전에는 관심사에서도, 감시망에서도 벗어나 있던 이들이 학교폭력이 이슈가 된 지금은 언제 사고칠지 모르는 ‘무서운 아이들’로 여겨지고 있다. 경찰까지 불러들여 억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니 학교폭력이 감소하고 있다는 통계가 나오기도 하지만, CCTV에 녹화되지 않는 교실과 사이버 공간에서는 오히려 언어폭력이 더 늘어나고 있다.
대체로 학교폭력 문제는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학생들 사이의 폭력’으로 인식되지만 오히려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학교의 폭력’이 더 본질적인 문제이다. ‘학교의 폭력성’을 없애지 못하는 한, 이곳을 누르면 저곳이 부풀어 오르는 풍선처럼 학교폭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폭력적인 게임과 영상에 학생들이 노출된 것이 문제라기보다는, 이런저런 수업으로 찢겨 획일화된 시간표에 아이들을 가두어 두는 근대교육체계 자체가 폭력이다. 선생님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왜 교육받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꼼짝달싹 못하고 앉아 있어야 하는 수업이 폭력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공공선이라는 선물로 포장된 폭력은, 그것을 벗겨낼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물리적 폭력보다 더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예전의 노바디들에게는 놀이가 있었고 함께 놀아줄 친구가 있어서 그런 대로 불만을 해소하며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운동장에서 뛰어놀 시간도, 아이도 없다. 그렇게 저항하지도 못하고 불만을 해소하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선택한 놀이가 왕따가 아니겠는가?
“놀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외로움이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왕따는 외로운 아이들 모두의 마지막 놀이로 자리 잡는다. 외로운 상황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왕따에 협조해야 한다는 불문율을 따르면서 말이다. 왕따에 함께하는 아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나 외로움의 두려움을 안다. 어울려 놀지 못하게 한 어른들 속에서 자란 아이들한테 깊이 자리 잡은 이 외로움의 공포는 그 강도가 꽤 세다. 왕따는 바로 이 외로움의 공포를 먹이 삼아 빠르게 살을 찌운다. 친구들 사이에서 고립될까 두려워 아이들은 왕따 놀이의 하수인 역할을 기꺼이 떠맡는다.”
- 편해문,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서울: 소나무, 2012)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학교공동체성을 회복함으로써 학교폭력을 예방하고자 하는 아트힐링스쿨은 이러한 교육현실을 바꿀 수 있는 참 좋은 시도이다. 이 사업은 학교 폭력의 피해자들을 치유하기 위해 시작했지만, 폭력적인 학교 문화를 바꾸지 않고서는 아이들의 상처를 해소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곧 나아갔다. 그래서 2013년에는 정규 수업시간에 학급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문화예술 수업을 진행하고, 교사 대상의 아트힐링스쿨도 병행하여 교사의 상처를 보듬고 교사가 학생들에게 다가서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영천초등학교에서는 5학년과 6학년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음악치유와 놀이연극을 수업을 진행했다. 이 학교의 이다솔 교사는 그 교육효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5학년에서는 리듬을 신체로 표현하고 음악에 맞추어 자기를 소개하는 수업을 진행했어요. 소극적이던 아이들도 리듬에 맞추어 자기를 표현하니 잘 반응하더라구요. 영화 라이언 킹의 주제곡을 아이들이 따라 부르다가 몇 소절의 리듬을 바꾸어 보기도 하면서 조금씩 새로운 곡을 창작해 갔어요. 서로 성격이 다른 아이들이 음악에 맞추어 활동하면서 서서히 단합하고 협동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참 좋았어요. 각자가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으니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죠. 하지만 두 시간 수업으로 끝난 것은 아이들이 많이 아쉬워해요. 우리 반에도 한 명의 왕따가 있었는데 음악치유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은 좋았지만, 수업이 끝난 지금은 그것으로 멈춰버린 것 같아요. 아이들의 마음을 열어서 하나 되게 하는 것에는 이르지 못하고 그 순간의 모둠활동에 그친 것이 많이 아쉬워요. 학기초부터 프로그램을 진행하지 못하고 학기가 끝날 때에야 강사가 왔는데, 이미 관계가 형성된 이후라 교육효과가 크지 않았어요. 다음부터는 학기초부터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좋겠어요. 올해 저는 임용되자마자 5학년 수업을 맡아서 많이 힘들었어요. 경험이 부족하니 상황마다 대처하는 것이 미흡했죠. 그런데 이번에 아이들의 활동을 지켜보면서 아이들의 성격도 빨리 파악할 수 있었고, 교사 워크숍에서도 아이들에게 다가서는 다양한 방법을 배웠어요. 다음 학기에는 제 힘으로 다시 한번 시도해 보려고 해요.”
설문조사 결과,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담임선생님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보였다. 이혼한 가정과 한 부모 가정이 25% 정도가 되어 학생들의 자존감이 낮고 부적응 학생도 적지 않은 영천초등학교이기에, 담임선생님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관심을 받고 싶은 아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다솔 교사의 다짐처럼 일상의 교육에서 문화예술활동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참 좋겠다.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나가보자.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예술교육이, 문화와 예술을 가르치는 교육이기보다는 그저 단순한 놀이일 수는 없을까? 아이들이 정말 원한 것은, 춤추고 노래하는 ‘치유 프로그램’이 아니라 아이들과 선생님이 함께 웃으며 떠드는 놀이의 시간이지 않았을까?
그 놀이의 시간마저 ‘교육’의 틀 속으로 다시 가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놀이는 자아발달과 깊은 관계가 있다. 좋은 교육을 바란다면, 아이들을 ‘지금 여기의 세계’에 빠져들게 하는 놀이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지금 여기 있기’의 태도 없이는 세상 어떤 것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공부나 직장의 일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여기 있기’와 ‘그냥 좋아서, 재미있어서 하기’가 예술 활동의 핵심이 되는 태도이다. 아이들은 놀이에 몰입해 자신을 표현하고 다양하게 체험하는 가운데 치유 받으며 성장해 갈 수 있다. 서구에서 학교를 일컫는 ‘스콜레(Schole)’라는 말이 원래는 ‘여가’를 뜻한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학교는 아이들이 친구를 만나서 놀기 위해 가는 곳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의 열다섯 번째 편지에서 프리드리히 실러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모든 상태 가운데에서 놀이야말로, 그리고 놀이만이 인간을 완전하게 만들어준다.” 우리의 아이가 왕따의 하수인으로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제라도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정호
(광주광역시교육청 민주인권교육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