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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으로서의 문화예술교육을 위하여
하정호(청소년플랫폼 마당집 대표)
(잔디광장에서의 문화예술교육축제 전경)
시월의 잔디광장은 예뻤다. 살랑살랑 가을 하늘을 간질이는 억새도 고왔고, 거침없이 내닫는 아이들의 발걸음도 경쾌했다. 올해의 문화예술교육축제를 문화전당 잔디광장에서 연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장돌뱅이 좌판처럼 펼쳐진 체험 장들이 낮게 깔린 구름과 멀리 보이는 무등산과 함께 어우러져 고즈넉한 가을 한낮의 풍경을 자아냈다. 나는 우리의 문화예술교육도 그런 풍경이 될 수 없는지 생각한다.
(광주비엔날레 '녹두서점'에서의 토론)
오늘은 비엔날레 전시관 안 녹두서점에 앉아 정근식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라는 물음. 두꺼운 자료집에 흩뿌려진 어려운 대답들과는 무관하게, ‘배경으로서의 문화예술’이라는 단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미 사라져버린 녹두서점이 전시관 안에 재현되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과거의 5월 항쟁과 오늘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게 녹두서점이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이 되면서, 그 안의 사람들은 일순간 무대 속 배우가 된다. 비엔날레 전시관 안의 녹두서점은 예술가의 ‘작품’으로 그 이미지를 재현하고는 있지만, 사람들이 그 안에서 자유롭게 토론할 때에야 비로소 그 의미가 채워질 수 있다. 녹두서점을 박물관 속 유물처럼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구경거리 신세에서 구해낼 것인가는 우리의 몫이다. 배경으로서의 예술은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와 주기를 바란다. 그 속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액자 속에 있는 우리는 하나의 작품이 되고 작품은 이제 더 이상 ‘작품’이기를 거부하며 우리들 삶의 배경이 된다.
녹두서점만이 아니다. 이번 비엔날레에 선보인 작품들 중에는 ‘배경’으로 기능하는 것들이 많다. 빅 반 데 폴의 ‘직선은 어떤 느낌일까?’라는 작품도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쉬도록 놓여 있다. 이 작품은 ‘오월어머니집’의 유가족이 매주 찾아와 서로 담소를 나누고 요가도 하며 치유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시장을 둘러보는 사람들에게는 그 유가족까지도 하나의 작품으로 보일 수 있지만, 유가족에게는 그 공간이 그저 배경일 뿐이다. 원형 벤치 위에 화분들을 올려 둔 ‘난투’라는 작품은 또 어떤가? 전시관과 전시관을 잇는 복도에 놓여 있어 원래부터 그냥 그렇게 있던 설치물이라 생각하고 지나치기 쉽다. 프라작타 포트니스의 <바느질>과 <당신이 밖을 볼 때까지 벗기고 또 벗기고>라는 작품은 아예 ‘작품’과 ‘배경’이라는 경계 자체를 무너뜨린다. 건물이 오래돼 금이 가고 부식돼 페인트가 벗겨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작가가 접착제를 가늘게 흘려서 벽에 금이 생긴 것처럼 표현하고, 접착제를 조심스레 벗겨내 페인트가 부식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벽에 붙인 작품설명이 없다면 아무도 그것을 작품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낡은 벽일 뿐. 작품을 걸어두는, 혹은 작품을 가두어 두는 그 벽이 배경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작품이 되었다. 부식되고 갈라진 비엔날레 전시관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다. 작가는 비엔날레 전시관 벽을 벗겨내고 또 벗겨내서 결국 우리가 그 밖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대체 그 밖에 무엇이 있기에? 별다른 것이 없다. 우리의 일상밖에는. 페인트가 벗겨지고 벽에 금이 간 어느 영구임대아파트에서는 지금도 한 노인이 힘들게 계단을 오르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어린이공원에는 과자 봉지가 나뒹굴고, 아이들은 교실 담장에 갇힌 채로 어디서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지나 않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빅 반 데 폴의 '직선은 어떤 느낌일까?')
(프라작타 포트니스 '당신이 볼 때까지 벗기고 또 벗기고')
나는 지금 그 ‘배경’을 상상한다. 현실의 공간들을 답답한 비엔날레 전시관 안으로 옮겨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터전을 작품이 되게 하는 상상을. 어느 허름한 영구임대아파트 계단 모서리에 화분들을 옮겨 두자. 오월어머니집에 찾아가 어르신들과 얘기도 나누고 오늘 저녁에는 이 시대의 녹두서점에 앉아 물끄러미 거리를 내다보자. 종이상자를 가득 싣고 지나가는 할머니의 손수레도, 둔중한 소리를 내며 오가는 버스들도, 우리가 살면서 남기고 있는 이 모든 흔적과 얼룩이 문화이다. 이 흔적이 때로는 우리 몸과 마음에 새겨지기도 하고, 규율과 제도에 깃들기도, 물질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면서 우리 삶의 배경을 이룬다. 야간자습을 하는 여고를 좀비들이 득실거리는 무대로 바꾸어보는 것은 어떤가? 답답한 사무실이 마치 온실처럼 보이게 벽과 천장에 풀과 나무, 꽃들을 그려보는 것은? 우리 삶을 이루는 이 모든 배경들이 작품이 될 수 있다. 예술은 동물원 우리 속에 갇힌 원숭이처럼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다버린 쓰레기봉투를 뒤지더라도 사람들 곁을 어슬렁거리는 도둑고양이가 차라리 낫다. 우리 삶의 배경을 이루는 이 공간들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일, 그것이 우리의 문화예술교육일 수는 없을까?
우리는 흔히 삶이라는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만년 조연’ 배우나 ‘무명가수’의 삶을 가련하게만 여기고, 스타들이 그들의 몫까지 빼앗아가기 때문에 그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부당한 현실에 대해서는 눈 감는다. 승자독식의 과도한 경쟁 때문에 힘겨워하면서도 언젠가는 내게도 좋은 패가 올 것이라 믿으며 노름판을 떠나지 못한다. 그런 투기꾼의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하루 열세 시간의 고된 학습노동을 강요한다. 수능에도 나오지 않는 음악과 미술은 아예 수업조차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줄도 모르는 아이들이 삶의 무대 위에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오르기를 바란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들러리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잠들어 있다는 것은 외면한 채로.
하지만 ‘주인공’이 되는 일과 ‘주인’이 되는 일은 다르다. 어떤 역할을 맡든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주인일 수 있다. 반주자나 ‘행인1’도 다른 누가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몫을 맡고 있다. 무대를 꾸미고 조명을 비추는 제작진이 없다면 스타들도 돋보일 수 없을 것이다. 각자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될 때에야 비로소 주인공도 온전해진다.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지만, 우리 모두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는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문화예술교육 또한 우리 아이들이 각자 자기 삶의 주인이 되도록 가르치는 데 기여해야 한다. 무대를 꾸미고 화단을 가꾸는, 우리 삶의 배경을 이루는 모든 일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데에 문화예술교육이 기여해야 한다.
('녹두서점' 엣터를 꽃으로 수놓는 김현숙 님;제일 왼쪽 )
문화해설사인 김현숙님은 광주민중항쟁의 현장들을 꽃으로 수놓는다. 꽃이 시들지 않도록 매번 찾아가 물을 주고 계절에 따라 꽃을 바꾸어 심는 번거로운 일들을 수년째 하고 있다. 방문객에게 오월의 역사를 들려준 후 그들이 헌화한 작은 화분들도 보살핀다. 올해는 104명의 송원초등학교 학생들로 시작해 이미 500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전주의 재개발지역에 있는 ‘문화공간 싹’에서는 아이들이 벽화도 그리고 노래도 만드는 동아리활동이 활발하다. 최근에는 한 초등학교의 쓰지 않는 창고를 문화 공간으로 바꾸는 일을 아이들 스스로 하고 있다. 마을 어른들을 찾아가 왜 그 일이 필요한지를 말씀드리고 도움을 구한다. 이 공간의 채성태 대표는 종이가 아닌 세상 위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말하였다. 그 꿈에 감동한 이웃 주민이 마음껏 그림을 그리라고 땅과 집을 내어주기까지 하였다. 이십 년을 한결같이 살아온 채성태 대표와 비교할 일은 못 되지만, 필자도 광산구 신가동 재개발지역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농협 창고를 빌려 아이들의 놀이터 겸 주민들의 쉼터로 바꾸는 일을 ‘창의예술학교’ 프로그램으로 진행한다. 학교를 마치고 지나가던 아이들이 벽에 페인트도 칠하고, 타일도 붙이고 못질을 하며 놀다 간다. 우리 삶을 이루는 배경들을 그렇게 조금씩 바꾸어가며, 크고 높은 담장들보다 허물어져가는 낡은 담장들이 더 예쁠 수 있다는 것도 배워가리라. 그런 배경이 우리 삶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우리도 그 배경 속으로 스미는 일. 그것이 문화적인 삶일 것이다.
('예술창고'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어린이)
매일 5시 18분에는 금남로 민주광장 시계탑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린다. 수많은 인파가 모여 각종 페스티벌과 집회를 여는 날에도 어김없이 그 노래는 울린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몇이나 그 소리를 들어보았을까? 겨를 없는 생활 탓에 듣지 못한 노래일지라도 그 아래 함께 모여 있을 때는 같이 들어보면 좋겠다. 시계탑을 꽃으로 수놓는 김현숙님은, 금남로에서 행사를 치르다가도 그 시간만큼은 마이크를 끄고 그 노래를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안타까워한다. 피로 물들였던 역사의 현장도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이미지나 배경으로만 남는다. 그 배경이 우리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물들이게 하는가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몫이다.
(5.18 시계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