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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경영,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에게 문화예술교육을 알게 하라!
주대창(광주교육대학교 교수)
행복한 삶과 아름다운 삶의 연계는 옛날 사람들은 물론 오늘날 사람들도 추구하는 본질적 가치이다. 과거에도 문명사회의 사람들은 배부른 삶만을 추구하지 않고 더불어 조화로운 삶을 바랐다. 그 이유는 현실의 여건들을 창조적으로 조합하여 행복이라는 시너지를 내는 것이 곧 아름다움의 추구와 같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공자는 예악사상으로 조화로운 품성을 통한 조화로운 세상을 꿈꾸었고, 플라톤은 음악의 품성 교육적 성격(에토스)을 내세워 정제된 사회에서의 공동체적 안녕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한 세상이 오늘날의 민주인권 시회가 아니었음은 자명하다. 일찍이 포퍼(K. Popper)는 그들과 같은 부류를 열린사회의 적들로 규정하였다. 아도르노(Th. Adorno) 역시 어설픈 계몽주의자들이 비인간화된 사회의 주역이 되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행복한 세상이 기능적 구조에 충실함으로서 얻어질 수 없다는 결론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심층적 성찰을 필요로 한다. 이를테면 약육강식, 협동체제, 역할분담, 상호배려 등은 개미나 꿀벌, 사자나 하이에나 무리 등에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무미건조한 조화 원리를 벗어난, 한 단계 더 진화한 문화예술의 유용함을 인식하여야 21세기의 행복 지향 사회가 가능하다.
문화예술이 아름다운 세상의 건설에 꼭 필요하다는 관점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성격이 시대에 따라 변해왔을 뿐이다. 문화예술과 바람직한 삶을 묶어 바라보는 관점은 찬반 또는 완급의 논쟁을 불러올 수 있다. 우선, 문화예술의 순기능적 관점을 여러 견해 중의 하나로 보는 경향이 없지 않다. 다시 말하면 문화예술이 인간 삶의 필수 사항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또는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 다음의 좀 고급스러운 삶의 형태라고 볼 수도 있다.
문화예술을 없는 것보다 나은 추가적 사항이라거나 치장을 위한 장식품 정도로 여기는 사람은 문화예술이 인간 본성의 발로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아마도 그 자신이 너무 현실적이며 물질적 세상에 충실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러한 가치에 종속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새로운 교육, 즉 문화예술적 개화가 필요하다. 문화예술의 근원을 이해하려면 생물학적 삶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고가 있어야 한다. 물리적 원리를 추상화하여 인간으로서의 보람과 가치를 드높일 수 있어야 한다. 멋있는 삶에 대한 보편적 갈구 또는 행복을 향한 가치 지향에 대한 신념과 그에 상응하는 사고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부연하자면 가치 지향적 사항들에 대한 위계를 살필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다.
문화예술로써 아름다운 세상을 일구어낼 수 있다면, 인격 주체로서의 우리가 사회 체제 및 통치 체제, 나아가 공동체적 삶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회피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개인적 삶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삶까지를 아우르려고 할 때 문화예술은 타인과의 교감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적 계몽은 이전 세대의 것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단순한 전수 차원의 교육이 아니다. 계몽 자체를 계몽하는 보다 근본적 가르침의 방향이다.
통치가 왜 필요한가? 또는 우리는 왜 통치를 필요로 하는가? 이 기본적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 야만화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의 행복을 벌써 타율의 세계에 맡기려는 의중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론적 성찰을 하면서 하나 분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 세상이 어떤 절대적 존재에 의해 창조되었든, 아니면 인간이라는 이성의 소유 주체가 인식해 낸 과정적 결과물이든, 우리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하는 세상을 원치 않는다는 점이다.
자율적 참정권의 행사로 행복을 향한 우리의 노력이 나름의 결실을 맺을 것이라고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권력자의 통치 행위가 인격적 승화를 이루지 못하는 한 그 어떤 민주주의도 미사여구에 그칠 것이다. 설령 통치자를 우리의 손으로 뽑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통치자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게 되었다거나, 우리의 인격 자체가 고상해졌다고 보기 어렵다. 나치의 히틀러도 선거를 통해 권력에 진입하였다. 선거에서의 판단이 과연 우리의 합리적 성찰을 통해 나왔는지 곱씹어보아야 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가 어떤 인격을 가진 통치자를 원하는지부터 따져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대통령 후보자의 자질을 ‘잘 살게 해준다.’에서 찾아 왔다고 볼 수 있다. 안전하게 사는 것 역시 그 속에 포함된다. 그런데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 스스로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국가를 경영할 사람에게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그것의 실행을 담보시킬 수 있다. 현재의 후보 중 누가 국가 경영을 맡든 그에게 분명한 가치지향의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 그래서 문화예술교육을 이해하는 대통령을 원한다고 말하고 싶다.
문화예술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나타내고 보장한다. 그 바탕은 자유이다. 자유에 의한 자유의 향유 및 수호가 문화예술교육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국가 및 세계의 공영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서 솟아난 사랑을 바탕으로 행복을 추구한다면, 교육은 모름지기 문화예술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국가경영 역시 마찬가지이다. 혹자들은 인문학적 사고를 자주 이야기한다. 인문학의 꽃과 열매가 무엇인가? 그것이 문화예술 아닌가? 인문학적 사고를 문화예술로 이끄는 교육, 그것이 자연과학 및 공학과 만나고 재화 창조와 직업 등의 실용적 부분과 연계되는 교육을 꿈꾼다. 그러한 교육의 원리를 이해하여 국가를 경영하는 대통령, 우리가 그려보아야 할 그림이다.
문화예술교육은 인간의 자율의지에 기인하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의 합일 추구하며 지속적 승화로 진화를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철학을 지닌 대통령이라면 다양한 이슈가 맞물려 있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줄 수 있는 정책을 펴고 그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소위 무식하게 중세시대 또는 절대왕정 내지 제국주의시대에서나 통용되던,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직선적 통치체제를 통해서는 우리가 꿈꾸는 세상, 우리가 진정 원하는 세상을 현실화하기 어렵다. 정치가들, 특히 최고의 권력자들은 이제 문화예술 지향으로 계몽되어야 한다. 즉, 본질적 문화예술교육을 이해하여야 한다. 문화예술을 가진 자들의 사치나 향연 정도로 이해하는 수준으로 대한민국을 경영하지 말기를 간절히 바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정치지도자들이 내세운 몇 가지 상징적 약속이 있었다고 한다. 부의 축적이 최우선이던 시절에는 “바나나를 마음대로 먹게 해 줄게.”가 지지를 이끌어내는 요소가 되었다. 바나나는 좋은 먹거리이다. 더구나 따뜻한 곳에서만 자라므로 위도가 높은 유럽 나라들에서 그것을 싼 가격에 먹을 수 있다면 경제 성장의 징표가 될 수 있었다. 바나나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사회에서 “해외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해 줄게.”는 한 단계 높은 삶의 질을 약속한다. 해외여행은 해당 국가의 경제력과 더불어 국제 신인도까지 고려되는 사항이고, 특히 문화예술의 탐방을 전제한다. 졸부들의 먹고 마시고 게임하는 식의 여행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문화예술 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것이 해외여행 장려의 명분이며 가치이다.
자, 이제 해외여행까지 큰 불편 없이 다닐 수 있게 된 한국 사회에서 다음 대통령은 무엇을 우리에게 약속할 수 있을까? 인간의 보편적 행복 추구에 보다 가까이 가는 상징적 목표를 내세워야 할 것이다. “문화예술을 제대로 향유하게 해 줄게.” 이 약속 어떠한가? 사실, 이 약속에는 국가를 경영하려는 사람의 철학과 더불어 품격이 함께 묻어난다. 문화예술이 개인의 삶에서 일종의 취미와 같은 것이라면 공동체의 삶에 관여하는 정도는 미미할 것이다. 문화예술은 사회의, 나아가 인류의 공동체적 선에 해당한다. 문화예술은 인류의 공동체적 고상함을 일구는 방편이며 우리 모두의 장기적 이익이다. 현재로서 그것을 능가하는 대안을 찾기 쉽지 않다.
강자가 되겠다는, 강한 지도자가 되겠다는 발상은 전근대적이다. 강약을 논하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화와 아름다움을 내세우는 새로운 국가 경영 패러다임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문화예술에 강약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한국 사회의 현실을 감안하면, 외모를 다듬듯이 자신의 표현을 다듬을 수 있어야 한다. 조악함을 우아함으로 승화시키듯이 문화예술의 관점에서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정제시켜야 한다. 국가 경영을 하려는 사람은 도구적 사고에서 벗어나 문화예술의 승화 작용이 사회에 스며들도록 마당을 열고 자릴 펴 주는 목적 지향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가 우리에게 문화예술을 가르치는 교육자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