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를 교육에서 찾아보자_임영규(전남도 정책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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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7-05-29 조회수 1,124

 

삶의 의미교육에서 찾아보자 

전남도 정책자문위원 임영규

 

왜 우리는 태어나서 죽는 것일까? 늘 머릿속을 감돌며, 오랜 세월동안 사라지지 않고 있는 질문이다.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순간까지도 까닭을 알고 싶어 할 절실한 것이지만, 아마 그 때까지도 결코 해답을 구하지 못할 성 싶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생겨난 것도 아니요, 세상을 떠나는 일 또한 마찬가지이다. 생명을 가진 것이라면 필연적인 생()과 사()의 궁금증은 일생을 두고서도 결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고 하겠다. 그리고 또, 사는 동안에는 과연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이 고민 역시 생사의 문제와 같이 무척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선악 등의 사리(事理)를 논리적으로,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이성(理性)의 인간으로 깨우쳐 주면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을 교육이라고 말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면서 현명한 삶의 방법을 터득하게 해주는 교육이야말로, 인생의 핵심요소이자 인간사회의 필수조건이다. 무엇보다도 교육이 중요한 점은 개인의 인격형성에서부터 사회의 문화조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히려 잘못된 교육은 사람의 정신을 병들게 하며 사회를 위험에 빠트리게 하는 주범이 될 수도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Retour a la nature)는 말은 프랑스의 계몽기 사상가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가 외쳤던 주장으로, , 책 등 사회문명 때문에 인간이 타락했다는 그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학문과 예술이 인간을 망쳤다며, 원래 순박하고 아름다운 품성을 지닌 인간을 자연 상태 그대로 두자는 루소의 주장은 많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공격을 받았었다. 특히, 동시대를 살았던 볼테르(Voltaire 1694~1778)그렇다면 사람들이 짐승처럼 정글에서 사냥이나 하며 먹고 살아야 하는가?”라며 강렬히 비난했다고 한다.

필자 역시 그러한 무교육주의의 주장과, 5명의 자식들까지도 양육비 등의 사유로 모두 고아원에 보내버린 그의 무책임한 행동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소위 그가 말하는 자연 상태라는 것이 숲이나 동물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이전의 상태, 즉 사람들이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고 해도 학문과 예술을 인간을 망친 원인으로 치부해버린 점에서는 쉽게 공감할 수 없다. 다만, 뭣 때문에 그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가는 한번 생각해 봄직하다. 인간의 타락은 그릇된 문명, 잘못된 교육이 빚은 현상으로, 바른 인간이 되게 하려면 교육을 올바르게 바로잡자는 역설적인 외침은 아니었는지...

      

반드시 행해야 할 의무로서의 교육 

독일의 성직자이자 학자였던 루터(Martin Luther, 1483~1546)6~12세 아동에 대한 취학 의무인 의무교육론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의무교육제도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시대를 거쳐 오면서 국가가 국민 교육권을 보장하는 의무라는 관념으로 변화했으며, 현재 세계 각국은 헌법에서 교육권에 대한 조항을 설정, 의무교육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헌법 제31조에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모든 국민은 그 자녀에게 적어도 초등교육과 법이 정하는 교육을 받게 할 의무가 있다. 의무 교육은 무상으로 한다.” 등으로 의무교육을 규정하고 있다. 교육법 제8조에서도 모든 국민은 6년의 초등교육과 3년의 중등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국가와 지방 자치 단체는 그 교육을 위하여 필요한 학교를 설치 · 운영하여야 한다. 모든 국민은 그 보호하는 자녀에게 상기 교육을 받게 할 의무가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완전 정착시켰고, 중학교는 1985년 도서·벽지에서부터 시작, 대도시까지 확대되어 2004년에 이르러서는 전 국민 9년간의 의무교육을 실현시켰다.

·중 의무교육 대상자를 포함, 고교생을 둔 학부모 중 대부분은 (학구적 필요성과는 관계없이) 자식이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지극히 마땅한 일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또 이중 많은 부모가 대학 중에서도 이름난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원할 것도 당연하다. 우리 사회에 있어서의 대학은 취업이전의 필수단계로 의당 거쳐야 할 과정이고, 그 대학의 상표에 따라 우수하게 평가받는 일 역시 이미 상식화 되어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다음엔 대학원이고 또 외국 어학연수나 유학, 박사라는 최고과정도 밟아야 한다. 이렇게 학력인플레가 생산한 고학력자가 즐비하여 학력으로서의 변별력이 없어지다 보니, 이제 박사보다 더 상위의 단계를 만들어야 할 판이다.

 

무엇에 근거한 교육을 해야 하는가?

오랜 세월을 배움에 집중 투자하며 젊음을 다 보내게 되는데, 겉으로 봐선 교육을 중시하는 사회 풍조로 매우 바람직한 현상 같아 보여 진다. 하지만, 정작 교육의 진정한 목적과 바람직한 방식을 실현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의도와 가치를 훼손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결국 자아발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인 대학 이전까지의 교육 목적은 대학 진학을 원활하게 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질 수 밖에 없고, 과정은 그것을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수단으로서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와 인식도 큰 문제이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교육의 내용이다.

우리나라 학교교육의 문제점을 들라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입시위주의 교육을 첫째로 꼽는다. 이는 학교교육이 오직 대학전형에만 기준을 맞추며 학생들의 개성과 창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거나, 제각기의 다양한 사회지식과 경험을 적절히 반영치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육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이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것인데, 뒤집어 생각해보면 대학입학 기준에 맞추다보니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학입시가 이전의 학교교육 수준에 맞춰 따라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상황을 누구나 잘못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학부모나 교육계, 정책당국이나 사회 등 모두 이를 개선하려는 의지나 행동은 너무나 미약하다.

학교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학원 등 입시기술에 능한 과외교육에 더 몰입하고 있고, 학교는 건강한 신체와 지적 성장, 이성과 감성의 조화, 사회성 발달 등을 폭넓게 꾀하는 교육 즉, 전인교육(全人敎育)을 추구한다면서도, 이를 실현 가능케 하는 예술과 체육, 사회연계 활동은 타 과목에 비해 상대적으로 현저히 축소시켜 놓았다. 문화예술교육은 특정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한 보충교육이 아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의 예를 보더라도 평생교육의 관점에서 접근해 수준 높은 예술교육을 지원하고 있고, 공동체 삶에 도움을 주는 교육으로 의식, 예술창작 실기활동을 보편화하고 문화접근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교육의 지향점을 되새겨보자 

우리나라 조선은 500년 장수 국가였다. 오랜 집권 세월만큼이나 수많은 공과(功過)가 있겠지만, 덕치(德治)를 우선하는 성리학적 통치철학이 왕조를 지속시킨 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덕치(왕도정치)는 인간의 자율성에 크게 의지한 것으로써, 백성을 포용하려는 정치였다. 인간화 작업을 소중히 여기고, 이에 모범이 되는 인간을 학예일치(學藝一致)의 사람이라고 판단했으며, 그래서 학문과 예술을 겸비한 사람을 국민을 다스리는 지도자로 설정했다고 한다. 학문으로는 (문장), (역사), (철학)을 공부시켜 이성적으로 성장시켰고, 예술로는 (), (서도), (그림)를 체득케 하여 감성을 풍부하게 하였다. 이렇게 이성과 감성이 조화된 이상적 인간형이 바로 선비였으며, 이들을 관리로 등용해 바른 정치를 하게하였다. 곧 선비는 관료이자 학자, 예술인 등 여러 분야에 다재다능한 인재로 훈련되어 졌다.

고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서도 여섯 가지 교육과목 육예(六藝)를 두었는데,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예의범절), (음악), (활쏘기), (마차몰기, 말 타기), (글을 알고 쓰는 법), (산술, 역학 등)이다. 이러한 육예는 당시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기술과 교양이었는데, 이 역시 지덕체(智德體)를 아우르는 전인교육이었던 셈이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절박한 현실이다. 

지금의 교육행태를 살펴보면, 먼 과거보다 더 효율적으로 진화하지는 못 할망정 도리어 저 멀리 퇴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저마다의 독창성, 제각기의 특출한 감성과 다양한 능력을 지닌 인재양성과는 상관없는, 획일화된 조건을 부여해 놓고 주입·습득시키고자하는 교육으로, 그 틀 안에서 상대방보다 더 빠르고 정확히 부합하는 기계 같은 생명을 양산하는 것으로 변질되어 있는 듯 보여 진다.

혹자들은 말할 것이다. 작금의 이 사회가 그러한 교육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고, 받아들일 풍토가 되어 있느냐고? 그렇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고 성공할 수 있는 사회냐고? 실제상황을 전혀 파악치 못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로 여겨질 것도 뻔하다. 하지만, 현대는 오히려 그러한 부분이 더욱 절실해진 시대이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졌던 것, 그동안 긴 시간을 투자하고 어렵게 교육받아서 진행했던 세상의 일들은, 이제 컴퓨터와 로봇 등이 거의 모두 해결하고 있다. 이것들의 힘에 의존해야만 하는 수많은 직업군이 효과 미흡이라는 명분으로 사라지고 있고, 이것들을 절대 이길 수 없는 교육은 미래에는 쓸모없는 무용지물로 전락되고 마는 것이다.

지금 당장 교육의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심각하고 매우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다. 언제까지 교육이 무생명의 정보·계산·파워 기기 등과 대적하고 있을 것인가? 그래봤자 처리능력상 그것들과 상대가 되지 않음을 바둑 알파고와의 경기 등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인간의 우수성은 그렇게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아무리 기술적으로 접근한다 해도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으로 새로이 평가받아야 한다.

인간만이 지닌 장점이 부각되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추구하는 교육으로의 변화를 꾀해야 한다. 그래서 실패와 정답이 없는, 창조와 다양성의 가치를 실현하는 문화예술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관련 전문가나 종사자, 일반시민 할 것 없이 이에 대해 함께 충분히 공감하면서, 효율적인 교육방식 모색 등 대안을 제시하고, 공공기관과 사회각계는 시대의 요구에 걸 맞는 교육풍토 조성에 힘을 쏟아야 할 시기이다. 더불어 그 이상을 활발히 펼칠 수 있도록, 폭 넓은 문화예술 활동기반 구축에도 많은 공을 들여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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