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씨의 삶이 예술과 만났을 때, 일어나는 현상에 관한 고찰_전경화(문화집단 열혈지구)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날짜 2018-04-30 조회수 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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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씨의 삶이 예술과 만났을 때, 일어나는 현상에 관한 고찰

 

전경화(문화집단 열혈지구)

오전 6:30! 

 비정규직 독거중년 무명씨를 깨우는 유리스믹스의 ‘sweet dreams’가 예약시간에 맞춰 재생된다. 무명씨는 몇 번 꼼지락거리다 점점 커지는 노랫소리에 맞춰 흥얼거리며 몸을 움직인다. 무명씨의 발걸음은 굉장히 빠르게 리듬을 타면서 출근 준비를 끝내고 집을 나선다. 미어터지는 지하철에서 구겨지는 몸을 간신히 버티고 겨우 일터로 도착했지만, 진짜 전쟁의 시작! 간당간당 위태로운 동아줄을 부여잡고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페르소나를 꺼내든다. 거울 속 모습이 이젠 낯설지도 않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의 또 다른 얼굴. 어색하지만 웃는 연습을 해본다. 최대한 싹싹하게, 빠릿하게!

 

 

 

 페르소나(persona)는 심리학에서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원래 페르소나는 그리스의 고대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다. 이후 심리학적인 용어로 심리학자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이 만든 이론에 쓰이게 되는데 그는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가면)를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쓰고 관계를 이루어 간다고 주장한다. 페르소나를 통해 개인은 생활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반영할 수 있고 자기 주변 세계와 상호관계를 성립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페르소나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심리구조와 사회적 요구 간의 타협점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이 사회적 요구에 적응할 수 있게 해 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출처_위키백과) 

 

 무명씨의 이런 처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저시급의 상승률에 따라, 인원감축명단에 올랐다. 점심시간 때, 따로 불러 영세한 사업장의 형편을 얘기했다. 실업급여를 탈 수 있게 처리할 테니, 재충전을 가지라고 한다. 복화술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말들을 애써 억누르고 옥상으로 올라간다. 휴대폰에서 유튜브를 열어 유리스믹스를 다시 듣는다. 달콤한 꿈이었다. 역시. 무명씨는 피식 웃으며 뮤직비디오의 동작들을 따라한다. 기분이 좀 풀린다. 내친김에 마릴린 맨슨 버전을 달리며 전투욕을 불태운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별일 없는 한, 내일도 이 하늘을 올려다보겠지?

무명씨는 마음의 변화를 느낀다.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는다. 바람이 무명씨를 훑고 지나간다. 무명씨의 눈가가 붉어진다. 무명씨는 마른세수를 연거푸 하다가 멈칫한다. 끄윽끄윽 비집고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가 낯설다. 이런 나는 누구일까? 

 

 

 

 무명씨의 팍팍한 삶에서 예술과 만나는 접점이 있을까? 당연히 있다. 셰익스피어는 세상은 무대이고 인생은 연극이라고 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한 개 혹은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통해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무명씨 또한 배우가 되어 연극을 하고 있다. 때에 따라서 페르소나를 끄집어낸다. 게다가 음악을 통해 삶을 움직이고 있다. 뮤직비디오를 감상하고 음악의 리듬에 맞춰 감정을 이끌어내고 반응한다. 또한 자연과 교감하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순간을 맞게 됐다. 이미 무명씨를 비롯한 이 땅의 수많은 무명씨들 또한 저마다의 삶에서 예술과 만나고 있다. 이것이 어찌 예술이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오히려 반문해본다. 과연 예술은 무엇일까?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선도 흐려졌다. 예술의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 예술을 나눔으로써 오히려 역차별을 했던 시절과도 안녕을 고하고, 보다 더 경쾌하고 힘 있게 안녕이라며 다시 인사를 건넨다. 예술가들만 예술을 할 수 있고, 특정 계층만 예술을 즐기는 시절이 아니라 모두의 것으로 돌려주면서 모두가 예술가적 감성으로 자신들의 삶을 다양하게 이끌어내려고 한다. 적극적인 무명씨들이 많아졌다. 문화예술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자극이나 에너지로 연결시키고 싶은 마음들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여기에 힘을 실어주고 길을 제시하는 안내자처럼 다가온 제도가 있다. 벌써 십년도 훌쩍 넘긴 문화예술교육이라는 정책이다. 최근 문체부에서 발표한 문화예술교육 5개년 종합계획 비전은 <삶과 함께하는 문화예술교육>이다. 재도약을 위한 전략으로 지역 중심, 수요자 중심, 문화예술교육 기반 고도화를 내세웠다. 수요자 중심 교육의 다각화는 생애주기별 맞춤형 문화예술교육 확대, 소외계층 대상 문화예술교육 지속 확대, 문화예술교육 지원 다각화로 세분화된다. 유아부터 아동·청소년, 청년·중년, 장년·노년, 소외계층과 사회통합을 위한 예술치유까지! 보다 세밀하고 다양하게 접근하려는 변화의 움직임이다.

 

 이 땅의 모든 무명씨들이 원하는 문화예술교육은 어떤 것일까. 이름을 되찾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결정타를 던지는 사회적·경제적 종속에서 벗어나서 공동체의 삶과 회복이다. 만약에 갑질하는 오너가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평등한 삶과 배려와 이해와 존중>이라는 키워드를 예술적 감수성으로 풀어냈더라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곪아터진 우리 사회의 곳곳이 예술과 만난다면? 비논리인 정치인이 예술을 한다면? 

 

예술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 사람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이웃을, 자신의 지역을, 사회를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Tony Kushner 미국 시나리오 작가, 비평가  

 예술과 삶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현상은 그 자체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해 보다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고 개인과 사회의 연결고리에 회의적인 시선보다는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시작은 어디에서 시작될까? 무명씨는 이젠 이름을 되찾기 위해 나는 누구인가, 근원의 질문을 던지고 나에 대한 탐색전에 들어간다. 어쩌면 문화예술교육의 출발은 결국은 나로부터 시작될지도 모른다. 흥놀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나에 관한 물음이었다. 무명씨들은 삶은 이미 예술과 만나고 있다. 하지만 그걸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

 

 경직된 우리 사회에서 당연한 현상이다. 누구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저마다의 예술을 하고 있다. 일상의 모든 것들이 삶을 버티는 요소가 된다. 트로트를 좋아하는 것도, 김치를 잘 담그는 것도, 만들기를 잘하는 것도, 노래를 잘 하는 것도 모두 다 예술이다. 모든 삶이 다 해피엔딩은 아니다. 흥놀이는 한(恨)을 흥(興)으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무명씨들의 이름을 되찾는 과정이다. 모두가 드라마를 갖고 있다. 모두가 특별함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위해 넘어야 할 지점이 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타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소설 『데미안』 中

 

 자신과 만나는 것.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본연의 나를 찾는 것. 그렇다고 내가 짊어지고 있던 그 페르소나들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 자기 자신이 쌓아올린 삶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응시를 통해 다시 되돌아보며 연어처럼 거슬러가는 과정이 시작된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가는 동안, 무명씨의 드라마는 다시 시작된다. 다가올 앞날도 꿈꾸게 된다. 인식의 변화는 삶을 변화시킨다. 이러한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무명씨들과 예술의 매개자인 예술가와 활동가의 교감이다. 교감에 실패하면, 무명씨들의 페르소나는 벗겨지지 않으며 이름도 찾지 못한다. 교육의 사전적 의미를 벗어나 어떤 기술이나 기교의 전달이 아닌 함께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라포 형성이 중요하다. 


 나를 알게 된다는 것, 나를 찾는다는 것은 이젠 보다 더 넓은 시야를 갖게 해준다. 나의 변화를 통해 삶의 예술성을 회복하며 가치와 의미에 더욱 중시하게 된다. 내 주변을 돌아보며 타인들을 바라본다. 실제로 흥놀이 프로젝트에서 나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느낀 참여자들이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예술적 참여를 이끌어내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든다. 무기력하게 삶에 끌려가는 내가 아니라 주체가 되어 창의적으로 활동하는 나를 만나게 되는 길.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바람일 것이다.

   

 무명씨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의기소침 비참하게 고개 숙이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뼛속까지 내려가 되찾은 진정한 자신을 위해 삶을 능동적으로, 보다 풍부한 감성으로 일상의 예술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흥놀이를 하러 갔다가, 오후에는 고용센터에서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조금 진전이 있는 것 같다. 게다가 독거중년인 무명씨는 관심사인 독거청년과 독거노인의 세대교류를 위해 <독거의 삶, 예술 하는 삶으로 함께하라>란 문화예술을 기획하려고 궁리중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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