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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원형성과 현대축제의 과제
윤성진 (‘한강몽땅’ 총감독 / 작은축제학교 교장)
▲한강 몽땅축제 ⓒgoogle
<원형적 축제의 정의>라는 주제로 강의를 해온 지가 벌써 10년 가까이 되는 것 같다. 인류가 사회를 영위해 온 역사와 축제의 역사가 같다고 볼 때, ‘원형적 축제’란 언제 축제가 만들어졌는지도 모를 정도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고대나 전통사회의 축제를 의미한다. 또한 해외에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오랜 기원을 갖는 축제들로 전통사회에서 축제가 담당했던 기능들을 그대로 유지해오고 있는 축제들을 지칭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일제 식민 기간으로 인해 오랜 축제의 소멸과 단절 기간을 거치면서 1945년 이전부터 지속되고 있는 축제가 손꼽을 정도이며 그나마도 축제들이 갖고 있는 원형성은 훼손되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정도이다.
고대 사회의 원형적 축제는 사회통합적 기능, 사회 치유적 기능을 통해 공동체를 유지시키고 강화시키며 전통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원형적 축제가 갖는 축제의 원형성은 ‘제의성’, ‘일탈성’, ‘유희성', '집단성’, ‘자발성’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전통사회의 원형적 축제는 주로 자연의 절기에 맞춰서 개최되거나, 공동체 사회의 상징적인 기념일에 행해지거나 관혼상제와 같은 사회적 의례와 연계되어 행해졌다. 필자는 원형적 축제가 가진 다양한 기능 들을 모두 관통하는 하나의 본원적 기능을 ‘사회적 치유’라고 보았다. 두려움의 극복, 부조화의 회복, 절대적 존재와 인간과의 합일,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 회복을 통한 ‘사회적 치유’가 축제가 가진 가장 중요한 기능이었다고 본다. ‘치유’란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 ‘정상상태로의 회복'(healing, cure, recovery)을 의미한다. 사회가 늘 건강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기능을 축제가 했다는 것이다.
세계보건 기구 헌장을 통해 보면 “‘건강한 삶’이란 질병이 없거나 허약하지 않은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건강한 삶은 ‘행복한 삶', '행복감을 느끼는 삶‘을 의미한다. 사회가 건강하다는 것 역시 ’행복감으로 충만한 사회‘를 의미한다. 전통사회의 축제는 결국 사회적 치유의 장치로서 기능하면서 공동체 사회의 ’행복감‘을 유지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던 것이다. 가, 무, 악과 놀이, 선의의 경쟁이 있는 경연행사, 가장 아름다운 의상과 장식, 가장 맛있는 음식과 환경 연출을 통해 ‘삶의 행복감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공동체에 제공해왔다. 단순히 무언가를 감상하고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고 참여하며 즐기면서 공동체 사회에서 일상적 삶을 영위하다 보면 반복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개인과 개인, 집단과 개인 간의 갈등과 균열을 메꾸고 봉합시키며 정서적 혼돈과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정서적 원점 상태로 돌려놓는 치유적 기능을 담당해왔던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공동체 지수를 갖고 있는 사회로 사회적 신뢰가 깨어진 위태로운 상태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 그것도 거의 모든 연령층(청년, 청소년, 40대, 노년층)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이고 있다. 자살은 사회적 병리 현상이 해결되지 않을 때 나타난다. 억압된 개인이 관계를 회복시키지 못할 때,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최악이 상황에서 자살은 선택된다. 우리 사회는 수천 개의 축제를 개최하고 있지만, 개인과 사회의 행복한 삶을 만들어 내는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셈이다. 축제가 병든 사회와, 깨어진 공동체, 억압된 개인의 삶의 치유, 회복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축제가 가진 원형성에 대한 탐구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축제가 가진 본질적인 가치를 잊은 채 일회성 이벤트들과 차별되지 않는 방식의 축제들로 사회의 ‘축제 피로도’를 높여가면서 ‘축제 무용론’이 연례적으로 되풀이될 때 ‘축제’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축제에 대한 몰이해로 만들어진 잘못된 축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정확히 지적하며, ‘원형성’을 간직한 ‘사회 치유의 기능’을 담당하는 축제를 그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축제’는 한 사회가 갖고 있는 문화적 치유기능의 총체를 보여주는 고도의 문화적 활동이며 사회적 자산이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축제’는 그저 그런 일회적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축제들은 개인의 삶에 아무런 감동도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축제의 원형성에 대한 탐구가 중요한 이유는 축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현대사회의 축제가 사회적 치유, 개인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를 고민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한 도시가 원하는 축제가 단순히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상품을 판매해서 도시를 알리고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라면, 축제의 원형성을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 홍보 잘하고, 예산을 적절히 투입해서 볼거리를 만들고 즐길 수 있는 이벤트를 잘 연출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축제가 전통사회의 축제가 가졌던 사회통합, 정서적 치유, 개인과 공동체의 자존감 회복을 목표로 하는 보다 본질적인 축제의 기능을 충족시키는 축제라면 우리는 원형적 축제가 가졌던 ‘일탈성’, ‘축제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축제의 치유적 기능을 담당하는 프로그램에 정성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희망적인 것은 현대사회에 개최되고 있는 축제들 속에서도 축제 수용자들이 주체적 역할을 하면 만들어 가고 있는 축제들의 주요 프로그램들 중에 이런 치유적 기능을 담당하는 프로그램들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필자는 축제를 만들어가는 사회의 DNA 속에 잔존하는 기억들이 축제의 치유적 프로그램들을 가능케 한 것이라고 본다. 효용적 가치나 예산 대비 효과, 긴 준비기간이 필요한 프로그램들로 상대적으로 가성비가 낮다고 생각되는 프로그램들이 때로는 우리가 기대하지 못한 호응을 이끌어내고 축제의 축제다움을 만들어가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런 프로그램들이 치유적 기능을 담당하는 프로그램들로 우리를 전통 축제의 원형성에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대규모 집단 연행 형태의 자발적 참여자들로 만들어진 퍼레이드나 집단놀이,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대규모 조형물이나 상징물, 거대한 불놀이, 대규모 시식 및 시음, 압도적인 화려함과 장식, 비 일상적 공간성의 구현,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놀이, 현대화된 기원과 정화의 의식 등이 현대 축제에 잔존하고 있는 ‘치유적 기능'의 프로그램이다. 우리는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 인간이 작고 나약한 존재임을 깨달음과 동시에 위대한 절대성과 인간이 만나는 체험을 통해 축제 참가자들 모두가 대단한 존재로 전환되는 지점을 경험한다. 이런 정서적 경험은 원형적 축제의 제의적 프로그램들이 만들어냈던 정서적 경험과 일치한다. 이 경험이 축제성의 핵심이다. 1000명이 호흡을 맞춰 강강술래를 돌며 만들어내는 무리 속에 들어서서 경험하는 집단 연희의 경험은 '나’를 잊게 하고 1000명을 하나의 실체로 만들며 개인의 한계성을 넘어서는 경험을 가능케한다. 작은 내가 거대한 공동체로 전환하는 경험을 한다. 일본의 마쯔리에서는 수천 명이 함께 같은 복장을 하고 춤을 추며 거리를 행진하는 경험 역시 개인의 경험을 넘어서 공동체가 가진 에너지를 경험하게 한다. 스페인의 발렌시아 빠야 페스티벌에서는 수백 개의 거대한 조형물을 하룻밤만에 태워버리는 의도적 소멸의 경험을 통해 개인은 자신의 묵은 정서적 상처와 갈등들을 불태우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정서적 카타르시를 경험하게 된다.
정치적 이해관계와 경제적 효용성이 영향을 미치기 힘든 ‘작은 축제’들을 만드는 과정 속에 우리 DNA 속에 잠재되어 있던 축제의 원형성에 대한 기억들이 자연스럽게 공동체 축제의 치유적 기능들을 담당하는 축제의 본질적 가치를 드러나게 만들고 다양한 치유적 프로그램들을 참여주체들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
▲한강 몽땅축제 ⓒgoogle
필자는 '한강몽땅’이라는 서울에서 가장 긴 기간, 가장 큰 장소에서 개최하며 가장 많은 방문객이 오는 메가 페스티벌의 총감독을 5년째 맡아오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것보다 더 긴 기간 동안 작은축제학교 교장으로 ‘마을단위’축제와 소규모 커뮤니티형 축제의 활성화를 위한 교육을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런 작은 축제를 통해 만들어진 자발적 축제 공동체와 이런 축제들이 만드는 지역축제의 생태계만이 지역의 대형 축제들을 받쳐주는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 내놓을 만한 세계적인 축제는 이런 축제 생태계가 형성되지 않은 곳에서는 나올 수 없다. 축제는 결국 불특정 다수의 ‘군중’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인격적 주체들인 ‘개인’이 만드는 매우 섬세한 정서적 활동이며, 밀도 높은 문화적 조형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