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놀이를 생산하게 하자 - 고길희(놀이더하기 아이들 연구소 대표)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날짜 2021-12-09 조회수 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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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놀이를 생산하게 하자


고길희(놀이더하기 아이들 연구소 대표)

 

놀이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한다는 것이 아이들에게 완전히 자유로운 환경을 제공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프로그램인 이상 이미 짜여진 시간표 안에서 미리 정해둔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이들의 움직임도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활동, 즉 준비된 놀이나 놀잇감을 경험하는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 고작해야 한 두 시간 내에서 이뤄져야 하는 프로그램인데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즐겁고 재미있게 놀았다고 하면 프로그램으로써의 역할은 다 한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맞다.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활동이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경험을 선물하고, 즐겁고 행복한 오늘을 만들어 주는 것도 사실이니까, 그거면 충분할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이들에게 정해놓은 놀이나 놀잇감을 건네주면서 하나의 상품이나 서비스처럼 소비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그래서 결국 아이들을 놀이 소비자로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놀이는 아이들의 것이다. 놀지 말지를 정하는 것부터 도중에 새롭게 또 다르게 규칙과 방식을 바꿀 수도 있고, 놀이를 중단하고 끝내는 것까지도 놀이하는 아이들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진짜 놀이’, ‘자유 놀이’, ‘구조화되지 않은 놀이등을 말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그렇게 놀았다. 자기들끼리 놀이를 생산할 수 있는 놀이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고, 어른들이 개입이 없는 세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게 자신들의 놀이 세계를 구축하고 확장해 나가는 경험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놀 때도 놀 데도 없어진 아이들을 걱정하며, 그들에게 적절한 놀이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한 어른들의 개입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놀이가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감 탓에 오히려 놀이는 더 큰 관심과 주목을 받으며 여기저기서 프로그램화된 형태로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현실을 안타까워한다고 해서 아이들 노는 데 어른들은 필요하지 않다거나, 어른들이 개입하는 놀이 프로그램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식으로 극단적으로 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나도 프로그램화된 놀이로 먹고사는 어른들 중 한 명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이들이 놀게 하려면, 아이들이 놀이 생산자가 되게 하자는 것이다. 놀이 생산은 어른들이 만드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놀이하는 아이들 몫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놀이를 소비하지 않고 생산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몇 년 전쯤 한 동네 살던 아이들과 놀 때다. ‘놀고 싶은 대로 놀자하고 동네 너른 터에서 놀았는데, 그날은 삽 몇 자루를 한쪽에 갖다놨었다. 아이들이 그걸 가져다 자기들끼리 구덩이를 팠다. 삽을 차지 못한 아이는 툴툴거리다 어디선가 나무 작대기를 구해다 작업에 동참하기도 했다. 힘들다 힘들어하면서도 서로 번갈아 가며 부지런히 파고 또 팠다. 그래서 그렇게 파고 나서 뭘 했느냐면, 구덩이 옆에다 돌 몇 개 가져다 놓고는 그 위에 볼일 보듯 앉아가며 자기들끼리 한참을 낄낄거렸다. 그리 대단한 사건도 아니다. 아이들은 그냥 팠을 거고, 파다 보니 깊은 구덩이가 생겼을 것이다. 거기다 돌 몇 개 더해서 그들만의 놀이를 완성한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땅 파고 놀기에 특별한 의미를 두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하나는 삽을 가져다 두기만 했을 뿐 사용에 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땅을 파는 과정에 어떤 식으로도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로지 아이들 틈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미리 조직해놓은 과정, 즉 프로그램을 제공하지 않았어도 자신들의 놀이를 생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른인 내가 현장에 있었음에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와 같은 존재처럼 여겨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니 뭐 애들끼리 삽질 좀 하고 놀았던 것에 그렇게까지 의미부여를 하고 그래, 아이들이 땅 두 번만 팠다가는 어쩌려고 그러나 할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놀이 생산자가 되게 하는 것은 매우 단순하고 쉬워 보이지만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거짓말하는 어른]에서 김지은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어린이는 어른이 없는 사이에 자란다. 어린이에게 좋은 세계는 어른이 얼마쯤 눈길과 손길을 거두어도 편안하게 놀 수 있고 이것저것 마음껏 해볼 수 있는 세계다.” 나는 그녀의 말이 아이들을 놀게 하려는 어른이 되고 싶다면 어른이 없는 틈을 내어 줄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봐도 못 본 것처럼’ ‘알아도 모르는 것처럼’ ‘있어도 없는 것처럼그렇게 아이들 사이에 서 있을 수 잇는 용기 말이다. 그래야 아이들이 자기 놀이 세계를 편안하게 마음껏 펼쳐나갈 수 있을 테니까.

 

놀이는 교육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마치 꿀 바른 쓰디쓴 약처럼 쓰여 왔다. 교육적 효과와 결과를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프로그램이었다. 부끄럽지만 나 또한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아이들을 만나왔다. 놀이해서 얻는 교육적 목적을 정해놓고, 그에 어울릴 만한 놀이나 놀잇감으로 활동 과정을 미리 짰다. 아이들을 만나려면 그러는 게 당연하다 여겼다. 그래서 프로그램만 잘 만들어 가면 아이들과도 잘 놀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계획하고 기대했던 것만큼 잘 안됐다. 아이들을 만나는 데 필요한 기술(know-how)을 몸에 익히려면 시간이 쌓여야 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attitude)를 몸에 베이게 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많은 시간들은 프로그램을 바꾸게 한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을 만나는 나의 관점과 태도를 바꾸도록 만들었다. 놀이 기획안을 이렇게 써보고 싶은 상상을 해보고 있으니 말이다. “창의성이니 사회성이니 그런 건 잘 모르겠고, 다들 놀고 싶은 대로 놀겠습니다. 이것도 가져가고 저것도 가져가긴 할 텐데, 아이들이 놀고 싶어 하면 다행이지만, 안 하겠다 그러면 뭐 어떡하겠어요. 그래도 같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뭐라도 하고 놀지 않을까요. 그러다 보면 아이들은 어느 틈엔가 놀이 생산자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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