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호] 이것도 문화예술교육이 되나요?(김월식 무늬만커뮤니티 대표)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날짜 2022-07-06 조회수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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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문화예술교육이 될까요?

김월식 (무늬만커뮤니티 대표)

 

무늬만커뮤니티 가 진행한 '우리동네 벽화미워2'

 

 

 

프롤로그

맹세컨데 단 한번도 그 어떤것이 문화적이라든지 예술적으로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런 질문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아니면 내가 오히려 너무 이상한가? 모르겠다. 아직까지 내가 사는 세상은 모두가 문화적이며 모두가 예술적이고 또한 모든 것이 삶을 향하거나 관통하고 있었으니 어찌보면 매우 거대한 문화적 담론 속에 내가 살고 있는것 처럼 보일 수 있지만, 또 어찌보면 삶과 너무 밀착되어 있는 이런 황공함이 미시적이기 때문에 잘 느껴보지 못한 당연한 영역이었을 수도 있다.

 

 

아빠

쉰 살이 다 되어 장가를 간 나로서는 늦둥이 네 살배기 딸이 너무 이쁘고 소중하다. 다들 그렇겠지만 품안에서 떼어놓기가 안타까울 정도의 사랑이라는 것이 이렇구나 하고 처음 느낄 정도니 딸을 대하는 모든 면면이 사랑 가득하다. 자식 앞에서는 팔불출이 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아의 과정은 고되고 어렵다. 수없이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떠들었던 육아에 대한 나의 말들이 대부분 거짓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반성을 할 정도다. 하지만 또 정신줄을 붙잡고 딸이 하는 짓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 행위 자체가 문화적 인간이 되기 위한, 문명을 배워가는 자기 학습적 몸부림이라는 사실을 읽어 낼 수 있다.

 

딸은 바닥에 떨어진 작은 물체를 자주 집어 먹는다. 대부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어서 그런 딸을 보면 그 행위를 막아주고 먹어서는 안 된다고 일깨워준다. 하지만 딸이 내 눈 밖에서 훨씬 많은 것들을 주워 먹고 배가 아프다고 울거나 맛이 없다고 인상을 찌뿌리는 것을 나는 안다. 그리고 그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결국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서는 안되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아낸다. 이것을 조금 더 문화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딸은 촉감과 미감을 통해 사물을 관찰, 탐색하고 자기의 방식과 속도대로 그것에 대한 사유의 시간을 갖는과정에 있는 것이다. 오감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탐색의 시간 속에서 세상 만물을 사유하고 이해하는 절대적 시간을 갖는 것이다. 시각적 관찰만 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영역을 다른 감각으로 이해하며 세상을 살아내는 의 과정에 다다르는 것은 문화예술교육의 철학과 다르지 않다.

 

 

 

▲ '햇빛을 찍어먹는 아이' (김월식 대표  네 살배기 딸)

 

 

 

그러던 딸은 한 겨울의 어느 날 창문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을 찍어 먹는다. 집안의 어둠을 가르는 그 햇빛을 계속 찍어먹으며 맛을 음미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웃음만 난다. 하지만 이 귀한 풍경에서 내가 읽어 낸 문화적 예술적 의미는 남다르다. ‘햇빛을 찍어먹는 아이라니.. 물론 나도, 또 누구나 어린 시절 햇빛을 찍어 먹는 행위를 했을지 모른다. 그런 경험이 축적되어 나를 예술가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도 나에게 그 누구에게 햇빛을 찍어먹는 행위에 대하여 강제적으로 그것을 말리거나, 너무 좋은 행위이자 습관이라고 지적해준 사람은 없다. 아마 대부분의 어른들이라면 그런 행위를 하는 어린이들에게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을 것이 분명한 이 행위는 반문명적이고 비문화적 행위에 가까울 것이다. 이른 바 기능적이고 효용적으로 디자인 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의미 없는 행위는 그저 미친 짓에 가까운 퍼포먼스 일 뿐이다.

 

딸은 이제 막 색칠공부라는 세계에 입문했다. 본능적으로 이쁘고 귀여운 공주의 이미지와 동물의 이미지를 찾아내고 그 외곽선 (out line)안의 빈칸과 빈칸을 색연필로 칠한다. 하지만 아직 네 살배기 아이의 손은 아물지 못해 빈번하게 빈칸을 벗어나가나 가로질러 꼼꼼하게 색을 메우는 색칠공부의 원래 목적에 벗어나고야 만다. 몇 번 그 과정을 반복 하던 딸은 가끔은 아예 대놓고 큰 팔꿈치 근육을 사용해서 형태를 무시한 채로 공책 전체를 가로지르는 선들을 그려댄다. 나는 딸이 색칠에 재능이 없나? 아니면 재미를 못 붙이나? 혹은 꼼꼼하거나 집중력을 가르쳐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일련의 생각들을 잠시 하다가 이 장면들의 문화적, 예술적, 교육적인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또 이 장면에서 문명화 된다는 것, 사회화 된다는 것, 매뉴얼의 방식에 따른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따라온다. 모든 부모들의 강박에 숨어 있는 꼼꼼함, 세심함이란 것이 결국은 자신의 아이들이 정해진 금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강박이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다. 다수의 무리에 있어야 하는 안정감, 정해진 선 밖으로 나가지 않는 안정감의 삶이 대부분 부모들의 바램이라면, 선 바깥의 문화, 상식의 선을 넘어서는 예술, 위험한 긴장감의 드라마, 다양한 몸짓을 만들어내는 몸의 건들거림 처럼 선을 탈주하거나 가로지르는 생애 최초로 문명과 대립한 인간의 야행성과 그런 기억을, 그런 용기와 실험성을, 그까짓 색칠공부의 선 정도는 넘어서 보는 위법과 위반의 상상력과 실천력을 충분하게 배려하고 격려하며 그 행위의 문화적 의미를 읽어 주어야 한다는 주관이 발동하게 된다.

    

 

시민(주민)

나는 종종 동네에서 생활의 달인급에 해당되는 시민(주민)을 보게 된다. 동네라는 범주는 넓지 않지만 적당하게 사람들이 삶을 살아내고 있고 그 삶에는 매우 고유하고 다양한 서사가 있다. 내가 말하는 생활의 달인이란 이런 고유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서사적 시민을 말한다. 사실 누구에게나 서사는 있고 이야기는 매우 힘이 세다. 이 개인의 서사를 어떻게 대상화 하지 않고 윤리적으로 호명하느냐? 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최근의 과제가 될 만큼 지금 각 지역에서 개인의 서사를 소비하는 방식에 매우 비판적이지만, 벌써 20여년이 넘는 나의 시민에 대한 짝사랑이 나의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철학과 신념을 만들었다는 사실만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늦게 결혼하고 늦게 딸을 낳은 노총각의 살림은 늘 남루하고 지난하다. 음식만들기와 청소하기, 빨래하기 등의 아주 기본적인 살림부터 문제가 많다. 그래서 늘 동네 식당 할머님의 김치찌개를 먹으며 이거 예술인걸!”하고 외치고 동네 세탁소 사장님이 꾸깃꾸깃한 와이셔츠를 다리는 모습(스팀다리미에서 안개처럼 물이 분사되면, 거짓말 같이 안개가 거치는 정도에 와이셔츠는 완벽하게 하얗게 칼같이 다려진다. 나는 이 풍경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에 전율을 느끼며, 동네 자장면 집 사장님의 수타 소리에서 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인류학적인 누들로드(noodle road)의 문화적 전이와, 더불어 리듬을 밀고 당기는 사운드 아트의 경쾌함을 느낀다. 맛과 향을 겸비한 테이블 세계의 이 노포는 이 동네만이 갖고 있는 유니크한 극장이다.

 

 

▲ '무늬만 커뮤니티'가 기획해 현대미술관에서 진행한 중국집 사장님 공연

 


이렇듯 자장면이라는 음식이 만들어 지기 까지는 누들로드의 인류학적 계보와 문화적 특수성이 전이 되고, 대한민국의 압축성장의 산업화가 만들어 놓은 빨리빨리의 문화와 배달의 편리성이 합쳐지면서 빠르고도 맛있는 현재의 자장면이 탄생되었으니 자장면은 그 자체로 문화면서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고, 또 문화예술교육적인 가능성을 갖고 있다. 또 할머니의 김치 역시 몇해 전 유네스코에서 세계 중요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한 문화재이고, 우리가 매일 먹는 쌀은 3000여년 동안 동네의 농부들이 첨예하게도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량이 많도록 개선에 개선을 거듭해 디자인한 농경문화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늘 동네에서 문화적 고수를 만나 그들의 삶속에 존재하는 문화적 가치를 함께 소비하며 배우고 감탄한다. 그러하니 이 모든 것이 어찌 위대한 문화예술교육이란 말인가? (나는 우리 동네 자장면집 사장님을 국립현대미술관에 모시고 그분의 삶의 가치를 예술적으로 호명하는 공연과 전시를 한다. 그 분의 삶이 제도적 화이트 튜브에서 예술적 가치로 의미화 되는 것이 어떤 예술가의 작품만큼 중요하다는 것이 당시의 판단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계문화유산과 노인의 삶

지금 우리 동네는 화성(수원 팔달구와 장안구의 넓게 걸쳐 있는 정조가 쌓은 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들떠 있다. 이제 유네스코 법에 의하여 화성주변의 민가를 정리하고 녹지로 전환하고 있으며 그 빈자리를 카페와 프랜차이즈 음식점들이 채우고 있다. 차례차례 녹지로 전환되는 화성주변에 위치했던 내 작업실도 결국 헐리게 되고 우리 동네의 많은 노인들이 평생 살아왔던 동네를 떠났고 떠나야 하는 현실에 놓여있다. 벌써 부터 관광객들이 동네에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천박하게 그려진 벽화가 그들을 맞이한다. 평생 동네에 살았고 이제 막 동네를 떠야 하는 뒷집의 할머니는 폐지를 주어 생계를 마련하시면 독거노인이다.

 

동네 쓰레기장의 분리수거를 새벽부터 마다하지 않고 하고 계신 할머니는 예야! 무신 놈의 시상이 죽은 유산이 산 사람을 내 모냐?”며 나에게 하소연 한다. 이제 우리 동네는 화성이라는 하나의 전통문화가 다양한 삶의 서사를 내 몬 동네가 되어 버렸다. ‘노인 한분을 잃으면 도서관 한 채를 잃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지금 우리 동네에서 잃어버리고 있는 도서관과 개인의 서사, 삶과 문화의 다양성은 이제 다시 복원하거나 복귀하기 어렵다. 이제 문화는 그렇게 상대적, 선별적이 되고, 위계적이 되어 간다. 이런 모든 것이 문화예술교육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프레임을 조장하고 쓸모와 효용적 가치로 재편하려 한다.

    

 

에필로그

특별하게 예술가와 선생이 아니어도 아빠와 시민의 입장에서만으로도 언제든, 어디에서든 문화와 예술을 접하고 그 교육적 가치를 읽고 실천하고 즐거워한다. 물론 나의 입장에서 그렇다. 광야는 넓고 고수는 많다. 혹 내 주변의 스치는 무엇이 그 광야의 고수가 아닌지? 그 무엇의 가치를 문화적으로 다시 읽어낼 필요는 차고 넘친다.

 

 

 

'무늬만 커뮤니티'는 김월식 디렉터를 포함해 곽동열, 박영균, 이아람 작가가 정규멤버로 활동하는 예술가 그룹이다.

지역적 탐구를 기반으로 오랜기간 지역민과 교류하며 예술의 영역을 공유하는 커뮤니티 아트를 실천하고 있다.

'무늬만 커뮤니티' 이름 그대로 무늬뿐인, 즉 느슨한 관계로 개인의 활동과 재능, 참여 의지를 존중하는 커뮤니라는 뜻.

 

전국에서 폐지를 수거하는 108명의 노인들에게 받은 것들로 부처상을 만들고 그들의 소원을 배 안에 넣어,   

2014년에는 네팔 카트만두와 수원 지동에서 지역 주민들과 협업을 통해 영적 존재에 관하여 리서치한 결과로
각각 힌두교의 신을 골판지로 형상화 한 <가네샤>와 수원 지동 민간신앙을 바탕으로 한 <지동신>을 제작하는 활동을 하는 등

결과로서의 작품보다는 커뮤니티 안에서 여유 있게 관계를 맺으며 삶과 예술을 가까이 하는 모든 수행들이 작품의 주요한 부분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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