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뜬구름 편지] 심사하는 마음
광OO
날짜 2024-04-30


2024년 문화예술교육지원사업 심사 후 뒤풀이



아무도 묻지 않지만 언제간 말하고 싶었던

심사하는 마음


심사 좀 해본 세 명의 말들을

심사가 뒤틀린 한 명이 엮었다



“심사하는 마음”이라고 수첩에 적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서류와 인터뷰 심사장에 얼굴을 내밀었고, 마치고 돌아오는 길엔 번번이 심사가 뒤틀렸다. ‘내가 뭐라고 “고”와 “스톱”을 외치는가. 단체는 어째서 손님이 아닌 물건 자랑만 하는가. 문화예술교육은 왜 아직도 큰 바다 위에 떠 있는 꼬마섬 같은가.’

심사하고 온 날 밤엔 저녁 무렵의 가정집 전기 계량기처럼 머리가 미친 듯이 돌아가서 잠을 설쳤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잊었다, 내 일이 아니니까. 한데 가만 생각해 보니 이건 내 일이면서 우리의 일이다, 뒤틀린 심사로 또다시 단체와 문화예술교육을 마주할 자신이 없으니까.

그래서 심사 시즌이 끝난 4월 중순에 심사 좀 해본 세 명을 초대했다. 뒤풀이하면 속 좀 풀릴까 싶어서, 마음이 풀리면 코털만 한 실마리라도 보일까 해서. 말하는 사람은 솔직해지고 읽는 이는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이날의 대화를 익명으로 소개한다. ‘산, 들, 바람’의 마음을 들어보자.


뒤풀이하면 속 좀 풀릴까, 마음이 풀리면 코털만 한 실마리라도 보일까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문화예술교육과 이런 사이

바람 : 1990년대 말쯤 학교에서 대안교육을 배울 때 생태교육과 문화예술교육을 알게 됐고요. 2005년쯤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시작할 때나 문화재 활용과 마을 공동체 사업을 할 때 늘 문화예술교육이 기반이었어요.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을 때 문화예술교육이 기초였어요.


: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고 싶어 찾아갔는데 걔들이 굶고 있더라고요. 밥 해 먹는 것부터 가르쳐야 했고 그걸 문화예술교육으로 만들었어요. 지금은 내 생활이 문화예술교육 같아요. 인이 박여서 그런가. 사람이든 동식물이든 이런 식으로 만나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마음대로 끌고 가면 오래 못 가고, 잘난 체하다가 당하기도 해서요. 그들 나름대로 살게 해야 하는구나 깨닫는 중이에요.


 : 종교적일 수도 있는데 예술 앞에 서면 낫는 느낌이에요. 그걸 쫓아가는 과정에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내 안의 질문에 대한 답을 책, 미술작품, 혹은 꽃 앞에서도 구하곤 했고요. 예술을 매개로 사람과 만나고 공간을 느낄 때 엄청 행복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그랬으면 좋겠더라고요. 그리고 살다 보니 생애주기에 따라 질문이 계속 변하데요. 나이, 조건, 환경에 따라 변하는 삶을 충실히 살 수 있게 하는 동반자 같아요, 문화예술교육은.



예술 앞에 서면 낫는 느낌이에요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심사하는 마음

바람 : “배제하지 말자.” 그 마음을 항상 가지고 가요. 문화예술교육은 주류가 아니잖아요. 일단 해보려는 분들에게 기회조차 없다면 생태계가 더 위협받을 테니까요. 어떻게 하면 같이 해볼 수 있을지, 성장하도록 돕는 제도를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해요. 문화예술교육은 태도와 관계를 만드는 일이라서 단체가 이 지점을 얼마나 고민했는지 들여다보기도 하고요. 동지라고 생각해요. 저도 십 년 넘게 지원받았으니까요. 심사장에선 평가만 하면 되지만 컨설팅하고픈 마음이 동해요.


: “잘 듣자.” 나이가 들수록 심사나 평가가 조심스러워져요. ‘내가 누구이건대 이 사람의 일 년 살이를 결정하는가.’ 그리고 너무 순진한 발상일 수도 있지만, ‘탁월함’을 어떻게든 발견하려고 해요. 설령 가능성일지라도요. ‘첫 예술 경험’과 그때의 흥분을 상기하고 시작한 문화예술교육인지 봅니다. 그래서 잘 보고 잘 들으려고 하는데 쉽진 않죠.


바람 : 서류심사로는 도저히 알 수 없어서 힘들더라도 인터뷰 대상을 최대한 늘리려고 하잖아요. 종이엔 평이하게 쓰여 있지만, 막상 들어보면 그게 아닐 때가 있으니까요. 그러면 이제 재단도 힘들고 우리도 힘들지.


힘들다는 말이 나오길 기다린 사람들처럼 다들 구시렁대기 시작했다. 나 역시 사회자 본분을 잊고 말을 얹었다.


: 마음가짐도 있지만, 몸가짐도 있어요. 심사 전날엔 손톱 깎고 목욕하고 기를 쓰고 일찍 자요. 하지만 수십 단체를 몇 시간 내에 만나다 보면 몸에 한계가 와요. 잘 만나고 싶은데…….


 : 체력 때문에 난 인제 그만해야 할 것 같아요. (일동 그렁그렁)


 : “눈앞에 그려져야 해요.” 그림을 전공해서 그런가? 계획서를 읽다 보면 아이들이 뛰노는 가운데 선생님은 여기저기에 서 있겠다 싶고 계절이 변하면서 색감도 달라지고요. 하지만 개수가 많을 땐 스트레스가 엄청나서 하나를 읽고 빨리 지우려고 해요. 오기 전날엔 “참여자와 단체, 두 가지 입장이 되어 봐야 한다.”라고 기도하죠.




계획서를 보면 그려져야 해요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단체는 절박, 프로그램은 나른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라고 해야 할까. 단체는 늘 자원과 지원에 절박하지만, 만나려는 사람과 이유에 대해선 그만 못 하다. 꼭 해야 하고 잘할 수 있다고 하지만 도대체 왜 이 사람들을 이때 여기서 만나야 하는지 설득이 되지 않으니, 계획서를 들여다볼 때면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받은 듯 곤란하다.


 : 이번에 속상했어요. 이 분이 참여하고 있다면 기획이 이렇지 않을 텐데 그냥 타협하고 넘어갔나 싶은 곳이 있었거든요. 힘든 사람들을 만나겠다고 거창하게 말하지만 정작 계획을 보면 그 뜻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들의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구나 싶었는데, 결이 좋았던 분들이라 더 실망했나 봐요.


바람 : 광주에서 장애 청년들이 자기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문화예술교육으로 돕는 단체가 있어요. 지역사회에서 도움을 받아 결혼식까지 올려줬는데, 그게 하이라이트였죠. 원래 장애 청년들을 만나 오면서 그들이 뭘 원하는지 알고 있었고 여러 사람 손을 빌려서 해결하는 걸 잘했어요.

그리고 충북 진천에 있는 문인협회에서는 이주여성과 비이주여성이 같이 에세이를 썼는데 이주여성 한 분이 거기서 입이 트인 거예요. 시집살이를 글로 썼고 다 같이 토닥여주니 서서히 말을 꺼내면서 성격도 바뀌고 대학까지 붙었대요. 매년 에세이집을 내는데 베트남어, 중국어, 일본어로도 같이 낸다고 해요.


 : 지금 외로움과 고독사, 사회적 연결과 문화적 돌봄 등이 중요한 이슈 인데요. 세 집 중 한 집이 1인 가구고요. 광주에 1인 가구가 반이 넘는 동네가 있는데 자살하는 사람도 많다고 해요. 올해 그 동네 복지관에 가는 단체가 있는데 일단 교육대상이 필요해서 짝지었는지, 아니면 꼭 그들이어야 해서 가는지 계획서만으로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저는 문화예술교육이 돌봄의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정서를 돌볼 수도 있고 정말 살아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일 수도 있고요. 우유를 배달하며 돌봄 연결망을 만들 듯, 1인 가구의 특성과 문제를 고민해서 조심스럽게 잇는 기획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냥 ‘마을 알기’ 말고요.



본질은 사람을 만나는 것
 : 만나려는 사람과 소통하려는 의지와 자기 철학이 있는지가 중요해요. 몇몇은 먼저 방법만 들입다 이야기하면서 자랑하느라 바쁜데, 그 사람들을 왜 만나고 싶은지 말하지 못해요. 본질은 사람을 만나는 건데요.

 : 우리의 결론은 같아요. 한 사람의 삶이 달라지고 나아지는 데 예술이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문화예술교육을 지지하고 응원하잖아요. 그래서 “뭘 만듭시다,” “공연합시다.”가 중요한 게 아니죠. 더불어 문화예술교육을 하면서 기획자와 예술강사도 성장할 수 있어야 하고요.

 : 세상은 갈수록 팽창하고 갈수록 삶의 형태가 다양해지는데도 대상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아요. 예전에 성매매 여성들의 자활 프로그램이 너무 형식적이었고 자활센터 담당자도 그녀들을 뭉뚱그려 판단하길래 차근차근 자기를 찾아갈 수 있도록 한 명 한 명 도운 적이 있어요. 그냥 사람이거든요.
요즘은 일용직 청년들을 만나고 있어요. 그들에게 제 공간을 쓰게 해요. 새벽 6시에 문 열어두면 와서 차 마시고 가고, 겨울엔 자동차 열쇠를 두고 다니라고 해요. 차 타면 추우니까 제가 미리 시동을 걸어놓죠. 그것만으로도 문화예술교육이라고 생각해요. 어느새 형님, 동생 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털어놔요. 바깥까지 들리게 매일 음악을 트는데 지나다니는 사람들 걸음걸이가 달라졌어요. 일부러 음악을 꺼봤더니 “왜 안 켰냐.”라고 묻더라고요. 만나야만 교육이 아니라는 거, 마음을 천천히 변하게 하면 관계할 수 있어요.

 : 이거 말하면 일이 될 텐데……. 단체들이 교육대상을 인터뷰한 내용을 들고 와서 컨설팅에서 이야기 나누면 좋겠어요. 기획자가 ‘어디에서 누구와 만나겠다’를 정했다면 다음으론 대상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해요. 그때 비로소 방향과 내용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깨달을 수 있죠. 대상 인터뷰만 잘해도 컨설팅은 필요 없을 거예요.

이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전부터 계획서 앞단에 프로그램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줄거리와 대상 인터뷰를 넣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주제와 주인공이 보이지 않는 소설과 드라마는 조기 종영할 수밖에 없으니까.


문화예술교육이 쪼그라들고 있어요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안녕히 계세요

목은 칼칼하고 물잔은 비었고, ‘들’의 이야기에서 결말의 냄새가 풍겼다. 슬슬 집에 갈 때라고 느낄 즈음 ‘돈’ 이야기 나왔다. 누구나 원하지만 아무도 대놓고 바라지 못하는 그것이 막판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 예술 단체들이 힘들 때라 지원금이 더욱 중요하기도 한데 한쪽에선 이 돈을 리서치 비용으로 쓰기도 해요. 공공자금으로 샘플을 하나 만들어서 자기 사업을 확장하는 곳들이 있어요. 원데이클래스를 열기도 하고요. 옳다 그르다 판단하긴 어렵지만, 이런 경우엔 대상에 밀착하기보다 “사람들이 요런 걸 좋아하더라.”라는 쪽으로 기울어요. 누구를 위한 지원인가 싶죠.


 : 교육사업이 많아지니 제가 굶게 되더라고요. 지원사업을 밥줄로 생각하고 매달리다 보면 틀에 자기를 끼워 맞추면서 다양한 가능성을 죽여요. 그래서 다른 통로가 필요합니다. 먹고살 통로를 어찌 마련할지 요즘 저의 과제이고 실험하고 있어요. 문화예술교육이 삶과 밀접하다고들 하는데, 그 말은 곧 돈벌이가 될 수 있다는 뜻이거든요. 우리는 마음이 달라지고 기분이 좋아지면 기꺼이 돈을 쓰게 되잖아요. 지원을 받지 않고도 살 방법이 있다는 것이죠. 단체들이 일 년 동안 이렇게 고생해서 이 정도 성과를 냈다면 다른 길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는데, 지원사업이 오히려 단체를 자발적 노예로 만들고 있나 싶기도 해요.


바람 : 문화예술교육이 쪼그라들었어요. 널리 퍼뜨리지 못하고 영역만 겨우 지키고 있어요. 지역사회와 단체가 붙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조금 사업에만 얽매이면 답이 없어요. 지역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문화예술교육이 들어가길 바라고, 그래서 기초 센터가 필요하다고 느껴요. 아무튼, 답은 지역사회에 있다고 말하고 싶네요.


이 자리를 깔기 전엔 그저 심사하는 사람들의 심사를 헤아리고 ‘나만 힘들고 어렵지 않잖아!’ 하면서 내 묵은 찝찝함을 지우고 싶었다. 그러다 셋을 만날 궁리를 하면서, 계획서 속 땀내 나는 문장들과 기획자와 강사들의 달뜬 얼굴이 동동 떠올랐다. 설령 밥벌이라 몰아세운다고 해도 기울어가는 이웃과 동네를 위해 일을 벌이는 사람들이 어디 흔한가. 사람과 공간을 자빠뜨릴수록 부자가 되는 세상에서 말이다.


그래서 문화예술교육하는 이들에게 심사하는 마음을 풀어헤쳐 보이고 싶었고 세 사람의 마음이라면 충분하다고 믿었다. 아니나 다를까. ‘산, 들, 바람’은 깡깡한 심사위원이자 다정한 동지였다. 이 바닥의 뻔한 소리라거나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저것 떠나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당신의 안녕을 바라는 네 명의 숨은 응원단이 곁에 있음을 잊지 마시라. 당신의 마음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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