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뜬구름 편지] 두 팔을 접고 쉬어도 좋은 겨울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날짜 202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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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니가 있다 - ④

두 팔을 접고 쉬어도 좋은 겨울



윤샛별 / 독립서점 러브앤프리 대표



“문학의 힘이 크다는 걸 느껴요.”


늦은 밤, 서점에서 독서모임을 하던 중에 한 분이 말했다. 같은 책을 읽고 모르는 이들이 모여 각자의 생각을 나누는 자리였다. 문학의 힘이라는 게 뭘까. 2024년 가장 뜨거운 작가, 한강의 인터뷰에서 이 이야기가 나온다. “거칠고 딱딱하기만 한 세상에서 소설은 어떤 힘을 가질까요?”라고 기자가 묻자, 한강 작가는 답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정말 깊은 진실을 보거나 보여 주기 쉽지 않잖아요. 친구와 밥을 먹다가 ‘나는 요즘 산다는 게 뭔지 생각하고 있어’라고 고백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꺼내기 쉽지 않지만 표면 아래에서 우리를 흔드는 중요한 감정들, 깊은 의문들, 감각들을 문학이 다루면 그걸 읽는 사람들은 문득 자신 안에 있던 그것들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읽고 있는 소설 속 사람이 되어보며 자신으로부터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순간을 반복하면 자아에 틈이 벌어지면서 투명하게 자신을 직시하는 경험을 하게 되고요. 그렇게 소설은 여분의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를 연결하는 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경제신문, 2024. 10. 10.)


그날 서점에 모인 이들은 “문학의 힘”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강 작가가 말했듯이 소설을 읽으며 요즘을 어떻게 보내고 주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돌이키는 등, “자신을 직시하는 경험”을 하며 우리는 함께하고 있었다.


‘러브앤프리’ 서점 벽면 한편에는 손님들의 글쓰기 코너가 있다. 질문 하나에 각자가 생각하는 걸 포스트잇에 쓰고 붙여두는 코너다. 올해 첫 질문은 〈2024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였다. 많은 이들의 쪽지가 붙었다.


“덜 걱정하고 덜 울고 덜 힘든 2024가 되었으면 합니다.”

“괜찮아, 사랑해, 꽤 멋져, 또 보자.”

“네가 원하는 꿈을 펼쳐! 눈치 보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누구든 너의 삶을 응원할 거야. 인생은 네가 개척해 나가는 거야.”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 자신감을 갖고 항상 있는 그대로 멋지게 피어나기를. 응원해, 항상 나 자신이.”

“우리 딸들 항상 행복해.”

“아낌없이 사랑할 것.”

“소중한 것을 잃지 말고 새로운 것들에 연연하지 말자. 행복합시다.”

“나에게 더 집중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길…! 작년보다 조금 더 성숙한 내가 되길 바라봅니다.”



빼곡히 붙여둔 마음들을 하나하나 읽다 보면 눈시울이 붉어질 때도 있다. 모두가 자신을 응원했던 올해, 다들 어떻게 보냈을까. 연말이 되면서 새로운 질문 쪽지가 붙었다. 〈2024 당신에게 위로가 되어준 것은 무엇인가요?〉 어떤 한 해를 보냈을지, 내게 위로가 되어준 것들에 대해 떠올려 보며 서로의 이야기들을 벽면 가득 주고받게 될 거다.

11월 11일, 빼빼로 데이였고 또 서점의 날이었던 그날의 마지막 손님을 기억한다. 책을 정리하면서 눈을 마주쳤고, 그러다 사라지셨는데 카운터 테이블 위에 빼빼로와 쪽지 한 장이 있었다. 손님이 남긴 글을 한참을 보며 서 있었다. “숨이 버거울 때 ‘러브앤프리’에 오면 좀 나아져요. 감사합니다.” 2024년 위로가 되어준 것은 무엇인지를 작성한다면 그날의 일을 적을 테고, 그 손님도 언젠가 그날의 일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말려드립니다』(남섬, 향, 2021)라는 그림책이 있다. 제목 그대로 말려주는 이야기인데, 주인공은 빨래 건조대이다. 버튼만 누르면 기계 안에서 ‘돌돌돌’ 돌아가며 자동으로 빨래를 말리는 건조기 말고, 팔을 양쪽으로 ‘척’하고 펼쳐서 그 위에 빨래를 거는 파란색 건조대가 주인공이다. 무엇을 말릴까. 흠뻑 젖은 빨래도 ‘척척’ 걸어서 ‘쨍쨍’하게 말려주고 물 ‘뚝뚝’ 신발도 말려준다. 그리고 외친다 “자, 다음!” 열정 건조대다. 그래서 비에 젖은 우산도, 어린아이의 동생에게 물려줄 인형들도, 냄새나는 이불들도, 할머니가 정성껏 손질한 우거지도 “말려드립니다!”라며 크게 외친다. 건조대가 말리는 건 빨래만이 아니다. 지나가던 발 젖은 고양이도 네 발바닥을 건조대 위에 누워 꼬리 흔들며 느긋하게 말리기도 하고, 목욕하느라 힘들었던 멍이도 물기 많은 털을 건조대 아래 앉아 말린다. 때로는 새들도 건조대 위로 올라온다. 먹구름을 통과하느라 축 늘어진 깃털을 ‘짹짹짹, 짹짹짹’ 신나는 수다와 함께 말리고 간다.

그렇게 모두 모두 말려드린다며 신나 하는 건조대에게 이번에는 조금은 다른 손님이 찾아온다. 힘없이 걸어오는 한 사람, 건조대에 가만히 몸을 누이는데 표정이 좋지 않다. 건조대 아래로 눈물이 ‘뚝 뚝 뚝’ 떨어진다. 늘 힘차던 건조대도 이번만큼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도 그 사람을 바라본다. 그리고 힘이 들었는지 건조대도 살짝 휘어진다. 이번에도 잘 말릴 수 있을지…. 그림책을 한 장 넘겨 보니 온몸이 물기로 파랬던 그는 건조대 위에서 자기 색으로 몸이 변해 밝은 얼굴로 걸어 나간다. 역시나 말리고 싶은 건 뭐든지 말리는 건조대다.

 『말려드립니다』(남섬, 향, 2021) ⓒ윤샛별


소설 『단 한 사람』(최진영, 한겨레출판사, 2023)에 ‘목화’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목화는 열여섯 살에 이상한 꿈을 꾼다. 투신과 살해, 사고사와 자연사 등 무작위한 죽음의 장면을 목격하는 꿈이다. 그 꿈에서 누군가가 목화에게 말한다. “네가 구하면 살아.” 단 한 사람, 수많은 죽음 가운데 오직 단 한 사람만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할머니, 엄마, 그리고 목화까지 대를 잇는 업이었다.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 그중 단 한 사람만을 살릴 수 있는 일. 그보다 더 지옥이 있을까?” 한 사람을 살리는 ‘중개’라 부르는 이 일을 할머니와 엄마, 목화는 각자의 자리에서 해낸다. 할머니는 중개를 ‘기적’이라, 엄마는 ‘악마’라고 했다. 대대로 이어지는 중개를 셋은 모두 다르게 받아들였다. 목화에게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은 어떤 의미일까.

책에서 눈여겨본 것은 목화가 이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였다. 목화는 자신이 살렸던 한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살아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평범한 그들 일상을 확인해 본다.

                       『단 한 사람』(최진영, 한겨레출판사, 2023) ⓒ윤샛별


“중개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뭔지 알아?”
“글쎄, 살려달라는 말?” 목화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랑한다는 말.”(p.104)

그렇게 그녀는 타인의 삶과 죽음에 판단을 멈춘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마음을 다해 명복과 축복을 전하는 일,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난 사람의 미래를 기원하는 일”을 한다.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의 의미를 스스로 찾은 것이다. 단 한 권의 소설에는 그렇게 ‘단 한 사람을 살리는’ 과업을 끊임없이 고민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지금의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일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문화 예술 현장에서 한 해 동안 바쁘게 뛰었을 많은 이들이 있다. 어쩌면 무엇이든 말리는 건조대처럼 지역에서 어린이, 청소년, 어르신, 남녀노소, 다양한 세대를 ‘문화 예술’로 만나왔을 것이다. 많은 것을 공유했을 테다. 또, 단 한 사람을 구해야 하는 과업으로 끊임없이 고민하는 목화처럼, 음악으로 춤으로 미술로 문학으로 각각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시도와 공백과 그 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있었겠지만 참여자들은 숨통이 트였을 테다. 때로는 마을, 때로는 축제 현장, 때로는 학교, 때로는 작은 공방에서 말이다. “올해 어떻게 보냈어?”라는 질문에 “별거 없었어.”라고 말하는 그 안에는 반짝이며 빛나는 시간이 있었다. 문화 예술 현장에 당신이 있어 위안을 받고 일상의 힘을 되살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떠올리며 눈 내리는 겨울엔 건조대처럼 양팔을 접고 쉬어야 한다. 휴식하며 책을, 문학의 힘을 느끼길 바라며 책방 주인의 편지를 갈음한다.




윤샛별 / 독립서점 러브앤프리
어릴 적부터 만화책을 좋아해 만화방 주인이 꿈이었다. 월급날이면 지인들에게 책 선물을 즐겨 했고 여행을 다닐 때면 동네 책방 탐방을 빼놓지 않았다. 청소년활동 지원 현장에서 10년을 근무하면서 ‘책’과 ‘성장’이 주된 관심사였고, 청년인문공동체의 멤버로 공부했었다. 문화예술단체에서 ‘청년’을 주제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책과 인문예술 클래스를 접목하는 독립서점 러브앤프리를 6년째 운영하고 있다. 2022년부터 라디오 국악방송 ‘윤샛별의 금요책방’ 게스트로 참여했으며 현재는 KBS 라디오 에 남도책방 코너에 게스트로 참여하고 있다.


독립서점 러브앤프리
‘사랑하며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바람’을 담은 독립서점이다. 근대역사문화마을 양림동에 위치해 있으며 1층에서는 개성 있는 독립출판물과 굿즈(문구)를 판매하고 2층에서는 클래스를 운영한다. 책을 매개로 지역 작가, 예술가, 창작자들과 협업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지역기반 복합문화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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