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구름 편지] 현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_연결하기
광OO
날짜 202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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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을 계획하기 - ②

현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_연결하기


민병은 / 지혜로운 봄 대표




우리에게 기획이란 어떤 의도나 목적으로 세부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이다.

각각의 특정 상황을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줄이거나 강화하는 대응과정이다. 바꿔 말하면 현재의 상태로부터 바람직한 상태가 되려고 –참신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실험적인 등의 방법으로- 실행하는 의도적 과정이다. 때문에 우리가 하는 기획은 실제 재현하는 실행의 장을 통해 과정과 결과, 성과가 드러난다. 이러한 전체적인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을 우리는 현장이라고 말한다. 공사 현장, 교육 현장, 사건 현장처럼, 현장은 실제 행위가 일어나는 그곳, 그 순간을 지칭한다. 모든 기획이 실행을 전제하겠지만, 문화예술교육에서의 기획은 특히 ‘현장’을 통해 실행하고 성과를 측정하고 다시 환류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현장은 어디인가. 또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기획하기는 기획서 양식에 기재된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문제를 인식하고, 조사해서 콘셉트를 잡고, 세부계획을 진행해 성과를 내는 순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기획자가 문제를 감지하고 생각으로 이어질 때 ‘이것을 하고 나면, 정말 이렇게 되면 좋겠다….’라는 상상이 ‘될’ 때가 있다. 허무맹랑하고 뜬구름 잡는, 그냥 해보는 상상일지라도 나는 이런 상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상상한 뒤에 알아야 할 것들을 찾고 연결하고 구체화했으면 한다. 기획자의 상상을 맘껏 토하는 자리가 있어야 프로젝트를 해야 할 동기나 의욕도 생긴다. 근거 없는(?) 열망도 생긴다. 그러므로 기획서 양식을 켜두고 기획하지 말기를. 처음 칸에서 끔뻑거리고 있는 커서를 바라보며, 공백을 채울 생각을 하면 일단 괴롭다. 기획서 쓰기(기획서 양식에 칸 채우기)와 기획하기는 다르다.





현장은 마주치는 모든 것이다. 

마주침은 지각이 따르는 인지적 활동이다. 마주쳤으나 지각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간 어떤 것은 머리에 남지 않는다. 어떤 사건, 사물, 사람 혹은 상황을 마주했을 때 머릿속에 생각이나 의문 혹은 느낌이 들었고 물음이 들려온다면 현장이 만들어지는 신호다. 마주침은 무언가에 호기심,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만물은 잉태 중”이다. 품고 있던 것이 기획자를 통해 드러나면서 현장이 만들어진다. 거창하게 말하면 기획자는 산파쯤 될까. 


 

어떤 도시의 아파트 단지에서 진행된 캐주얼한 단기 프로젝트 얘기를 해보자.

아파트에 사는 오십 대 여성은 매일 이용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여든이 넘은 노인을 만났고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받은 노인은 깜짝 놀랐다. 여기서 산 지 오 년이 넘어가지만 인사받기는 처음이라고 했단다. 인사를 건넨 여성은 그것에 놀라는 상황이 더 당황스러웠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이 회의 자리에서 ‘왜 그런 것 같아?’로 다시 등장했다. 그렇게 이 질문은 프로젝트의 시작점이 되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부터 현장이 시작된 셈이다. 그녀는 아파트에서 시내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호숫가에서 매달 살롱을 열었다. 주제는 매번 달랐는데 일상을 소재로 했기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얼굴을 익히면 인사를 건네는 것도 어색하지 않을 테고 이러다 보면 동네가 밝아질 뿐만 아니라 안전해질 수 있겠다고 믿게 되었다. 무겁지 않은, 경쾌한 프로젝트였다.


 

마주침은 흘려보내는 것과 다르다. 

마주치는 것만으로 확신할 수는 없다. 마주친 상대, 즉 우리의 대상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고 정말 그러한지 들여다봐야 한다. 이것이 관찰이다. 관찰은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감으로만 설명하거나 느낌만으로 제시하는 것은 의견일 뿐이다. 세상엔 다른 의견이 넘쳐난다. 문제의식을 구체화하는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의견이 아닌 사실, 즉 팩트체크다. 호기심에서 시작한 ‘왜 그럴까’라는 질문에 대해 ‘아마도 ~일 것이야’로 접근해선 안 되고 실제 그러한지 사실을 들여다보고 근거를 찾아보자. 



다른 예를 보자. 

노년층 거주비율이 60%가 넘는 동네가 있었다. 도시가 팽창하면서 산 주변에 생긴 마을이었는데 세월 따라 오래된 집은 더 낡고, 주민들은 고령화되었다. 노인 프로그램을 진행하려던 관계기관은 참여하는 주민들이 적고, 그나마도 잘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담당자가 집집이 찾아갔다. 문제는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노인들에게는 집을 나선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었다. 그들은 비탈길을 오르내리다가 넘어지거나 쓰러질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못 오고 있었다. 노년층에게 골절은 치명적 위험이다. 혼자 사는 노인이 거동을 못 하게 되면 일상의 어려움을 넘어 생명에 지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 ‘노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프로그램일까’에서 ‘그들에게는 어떤 보행환경이 적합할까’로 고민을 돌려야 할 때다. 행정 기관과의 연결지점이 문화관광과나 사회복지과에서 도로교통과 나 공원녹지과로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기획 전략이 달라져야 한다. 이런 상황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꼼꼼하게 사전 리서치를 설계하는 일은 현장을 만들어 가는 데 아주 중요하다. 경험은 기획에 중요한 자산이 되기도 하지만 객관적 사실을 가리기도 한다. 경험이나 의견은 기획 의도, 배경, 방향이 설정된 이후 세부계획을 구상해갈 때 빡쎄게 논의하자. 흔히 말하는 브레인스토밍은 의견을 제시하는 것일 뿐이다.



 



연결하기의 핵심은 사실 확인에 있다.

질문이 생겨난 현장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아가려면 현장을 둘러싼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기획자의 생각과 닿는 정보들을 유효한 것과 버려야 할 것으로 나눠야 한다.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선 관련 기관에서 조사한 통계자료를 살펴볼 수 있다. 또 누군가가 같은 문제의식으로 쓴 글을 찾아 읽어볼 수도 있다. 선경험자에게 이야기를 듣거나 위의 사례처럼 직접 인터뷰하는 방식도 좋다. 혹은 다른 프로젝트 사례를 통해 파악할 수도 있다. 마주친 어떤 상황이 정말 그런지,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새로운 정보를 찾아 나의 목적과 맥락이 이어지는지 연결해보아야 한다. 그러려면 관심 주제의 범위를 구체화해야 좀 수월해지지 않을까 싶다. 자기 프로젝트를 정부(政府)나 시군(市郡)에서 말하는 정책적 관점으로 제안하지 말자.


사례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다른 기획자들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우리는 다른 이의 기획을 베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문화예술교육에서 기획의 마무리는 참여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똑같이 베낀다 해도 그대로 실행이 될 수 없으므로 베낀다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 영화로 치면 오마주쯤 되지 않을까. 오히려 기획자들이 모여 공개적으로 사례공유를 했으면 한다. 이것이 공공활동이다. 






좋아하는 기획자가 있다. 한때 그의 기획을 들으면 화가 날 지경이었는데, 그만큼 훌륭했다. 그로부터 종종 영감을 받았다. 그의 지론은 이렇다. ‘문대면 새것 아닌가요? 해 아래 새것이 있는가요?’ 잠깐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는 말이다. 같은 기획이라 한들 상황과 조건에 따라 현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기획을 풀어낼 곳이 도시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다를 테고, 더 들여다보자면 농촌인지 어촌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참여자 나이나 삶의 경험에 따라서도, 사업할 장소나 공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핵심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 있다. 같은 기획을 가져다 쓴다고 해서 기획 의도, 배경, 사상 혹은 나름의 철학이 깃든 내용의 깊이까지 가져올 수는 없다. 같은 기획서는 있어도 같은 기획은 없다. 그러니 서로에게 자기 프로젝트를 자랑하자. 기획자들끼리의 만남도 아주 귀한 연결이라고 생각한다. 






민병은 / 지혜로운봄 대표

정책사업을 실현하는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문화공간을 운영하며 문화예술이 법, 행정과 무관하지 않음을,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미묘하기까지 한 지역과 끈끈하게 이어져 있음을 배웠다. 

지금은 컨설턴트로, 프로젝트 기획자로, 강사로, 가끔은 연구자의 모습으로 현장을 만나고 있으며 적당히 아름답게 상호의존 할 줄 아는 노년의 삶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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