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뜬구름 편지] 무모함으로 생기는 균열
광OO
날짜 202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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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함으로 생기는 균열


김옥진 / 마음놀이터 대표



    캔버스 가득한 한국화 작업실에 들어가며

‘서남이공’ 이지수 님을 만나러 ‘마음놀이터’ 옥진이 백만 년 만에 미술대학에 간다. 안개 낀 초여름 새벽과 같은 아련함과 통통 튀는 생기발랄함. 옷에 묻은 색색의 물감처럼 다채로운 생명체들 사이를 이방인처럼 신기하게 바라보며 걷는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하고 추억을 떠올리는 것을 넘어 작은 전율이 일어난다.


조선대 미술대학 한국화 대학원실 창가에 있는 이지수 작가의 책상 앞


작년에 서남이공을 처음 만났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인큐베이팅 단체로서 문화예술교육 씬에 첫발을 내디딘 네 명의 대학 선·후배들. 미술로 청소년들과 프로그램을 하겠다며 나를 찾아온 그녀들의 짐보따리엔 수업을 위한 모든 재료가 들어있었다. 먼 데서 넷이 마라탕을 먹고 그 묵직한 짐들을 이고 지고 내가 있는 곳까지 걸어왔다고 했다. (음, 그럴 수 있지. 아직은 무릎이 쌩쌩할 때이니.)


그날, 그들이 뭘 하고 싶은지 듣고 나니 무모해서인지 열정이 넘쳐서인지 헛웃음이 나왔다. 매번 바깥에 있는 광주폴리(Gwangju Folly, 도시 재생을 위한 건축물)를 돌면서 청소년들과 미술 작업을 하겠다고 했다. 듣기만 해도 바쁘고 정신없고 빡셌다. 우리는 한 회 한 회를 시연해보면서 덜어낼 것은 덜어내고 야외수업에 적합하면서도 주제를 표현하기 쉬운 매체를 함께 찾았다. 밤늦게까지 하얗게 불태웠다.


우리의 인연이 잊힐 즈음, ‘뜬구름 편지’에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지금 광주의 문화예술교육에는 어떤 이의 이야기가 필요할까. 어떤 뜬구름 같은 이야기를 쫓아가야 할까’하는 고민 끝에 서남이공 이지수 님이 떠올랐다. 흘러가지 못하는 지금의 문화예술교육 씬에는 서남이공의 무모함과 경계 없음, 몰라서 더 자유로운 뜬구름 같은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또한,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왜 예술가는 더이상 문화예술교육 씬에 등장하지 않는가. (아니, 이건 좀 어려운 질문인가.)


떠나온 지 삼십 년도 넘은 미술대학의 빛깔과 공기를 익숙하게 훑으며 이지수 님이 있는 한국화 작업실에 들어갔다. 길고 좁은 방에는 전시를 앞둔 서너 명의 대학원생들이 캔버스와 모니터 앞에 얼굴을 붙이고 있었다.


지금 문화예술교육 씬에서는 무모함과 경계 없음, 몰라서 더 자유로운 뜬구름 같은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서로 닮아있는 청소년과 광주폴리를 주제 삼아 문화예술교육에 도전

옥진 : 광주폴리에서 청소년들과 했던 프로그램은 잘(?) 끝났나요. 왜 그곳을 주제로 삼았는지.


지수 : 수월하게 모으긴 했는데 요즘 청소년들이 너무 바쁘더라고요. 열한 명 나오기도 했고 적을 땐 예닐곱이었어요. 끝나 갈수록 저도 아이들도 지치더라고요. 장소가 매번 바뀌니 헷갈려해서 한 곳에서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광주폴리와 청소년의 처지가 닮았더라고요. 사람들은 광주폴리에 담긴 이야기에 별로 관심이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십 대와 닮아있는 폴리를 통해 청소년기 정체성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었어요.


옥진 : 보통 문화예술교육 강사로 시작해 경험을 쌓은 뒤에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는데, 저도 그랬고요. 지수 님은 단체를 꾸려서 문화예술교육을 시작했어요. 어떤 계기였는지.


지수 : “수업을 들으면 자격증이 나온다”라는 선생님의 말과 현장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랑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문화예술교육사 자격증부터 땄어요. 문화예술교육을 해보고 싶어서 광주문화재단과 광주광역시청 홈페이지를 들여다봤더니 뭘 하려면 고유번호증이 있어야 하더라고요. 너무나 하고 싶은 마음에 어렵사리 단체 등록을 했고 학교 언니와 동생들을 꼬드겨 도전했는데 다 떨어졌어요. 그때는 왜 떨어졌는지 몰랐어요. 문화예술교육사 수업에서 배운 대로 썼는데 왜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죠.



    인큐베이팅 단체로 선정, 첫 보조금 사업의 경험

지수 : 그러다 운 좋게 인큐베이팅 단체가 됐고 멘토링을 받으면서 사업계획서를 쓰다 보니 조금 알겠더라고요. 어찌어찌 문화예술교육을 시작했지만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웠어요. 특히 보조금을 사용하는 방법 등, 모든 것이 막막해서 외려 수업이 가장 쉽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거의 울면서 했죠. 돈 쓸 때 작은 실수를 해서 사유서를 썼는데, 그때 자신감이 훅 떨어졌어요.


옥진 : 처음이라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겠네요. 편하게 물어볼 데도 없이 좌충우돌했던 한 해였겠죠.


지수 : 끝내고 나서는 나를 더 못 믿겠더라고요. 내가 너무 못한 것 같아서…. 마무리해서 속이 시원하다기보다는 아쉬움이 커요. 수업 끝나면 “안녕” 하고 끝일 줄 알았는데 아직도 애들이랑 연락하며 지내요. 생일파티 한다면서 자기들끼리 모이더라고요. “선생님, 너무 재밌었어요.”라는 그들의 말, “덕분에 재밌는 경험 했다.”라는 동료들의 말을 들으니 전혀 헛되지 않았구나 싶고요.


돌이켜보면, 수업 중에 빈틈이 생길 때마다 어색하더라고요. 뭘 할지 몰라서 계속 무언가를 하게 시켰는데, 어느 날은 그냥 막 같이 떠들었거든요. “샘~ 떠들어서 넘 좋았어요.”라는 말을 듣고, ‘아, 자기 이야기를 하게 해야 하는구나’하고 어렴풋이 깨달았네요. 인큐베이팅할 때 그렇게 하라고 배웠던 게 그제야 비로소 떠오르더라고요.



    예술가가 문화예술교육을 한다는 것

옥진 : 최근에 만난, 문화예술교육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예술의 영역에 있기보다 문화기획, 평생교육, 생활문화 쪽이 많았어요. 왜 문화예술교육 씬에서 예술가들을 만나기가 힘들어졌을까 생각하던 중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창의예술교육랩’에 참여했는데요. 거기에 모인 예술가들을 보면서도 왜 이들은 문화예술교육을 하지 않을까 궁금하더라고요. 예술가가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것에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을까요?


지수 : 창작을 위한 영감을 받을 수 있어요. 다양한 사람을 만나다 보니 생각하는 폭이 넓어지더라고요. 저는 작업할 때 캐릭터로 나의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사람들과 작품에 관해 이야기할 때 서로 위로를 받더라고요. 작품을 가운데에 두고 저와 관객이 즐거웠듯이, 문화예술교육은 예술로 이야기의 장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십 대부터 코스프레를 좋아했고, 사람들은 별로 좋게 보지 않았지만 저는 참 좋았어요. 오타쿠 친구들은 재능이 많고 유쾌하거든요. 나를 행복하게 하고 자라게 하고 삶까지 달라지게 할 수 있는 경험이 문화예술교육 같아요.


"사람들과 작품에 관해 이야기할 때 서로 위로받을 수 있듯이, 문화예술교육은 예술로 이야기의 장을 만드는 작업이라 생각해요."


    세상에 하고 싶은 모든 것, 언제든 다시 도전하기를
옥진 : 나의 세계가 세상과 만났을 때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질 수 있더라고요. 예술가들이 자신의 예술 언어를 세상의 문자로 표현하는 노력도 필요하고, 마찬가지로 지원기관도 예술가들의 투박한 진심을 읽어내기 위해 애쓰면 좋겠어요. 열심히 작업하고 있는 지수 님의 다음 계획이 궁금해요.

지수 : 전시를 준비하고 있어요. 한국화 대학원생과 중국 작가가 협업해서 6월 21일에 열어요. 올해 초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공모사업에 지원했는데 다 떨어졌어요. 면접을 보고 나오는 길에, ‘너무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후회했네요. 지금은 다른 단체의 프로그램에서 문화예술교육 강사로 참여하고 있고요. 예술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참 즐겁고, 미술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해요.

옥진 : 내가 하고 싶은 것에서 출발하니 좋네요. “내가 좋았으니 너도 해봐.”가 아니라 각자의 세상을 만나게 하는 장치를 좀 넣으면 어떨까 싶고요. 떨어지더라도 위축되지 말고 언제든 다시 도전해 봐요.


    야생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생명체가 출몰하는 생태계를 꿈꾸며
헤어지기 전 우리는, 주워온 돌 중에 날 닮은 것을 골라서 그 위에 각자의 얼굴을 그렸다. 그러고 보니 지수 님은 무용하지만 무해한 저 작은 돌을 꼭 닮았다. 그녀는 자신의 쓸모와 가치를 만들어 가고 있으니까.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를 거울삼아 이십 년 가까이 문화예술교육을 해왔던 나를 바라보기도 했다.

                
평범하고 작은 돌 중에 나를 닮은 것을 골라 각자의 얼굴을 그렸다


           



"다시 주변 세계는 새로운 원으로 정렬을 하고
대단히 뭔가 아는 줄로 착각했던 나는 어린아이가 되어 입장한다"

헤르만 헤세의 〈새로운 경험〉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지수 님의 무모함과 편견 없는 시선이 무뎌진 나를 돌아보게 한 것처럼, 문화예술교육이 다시 생생해지려면 우리는 야생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생명체가 출몰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야만 한다. 우리의 ‘뜬구름 편지’가 나 같은 이들에겐 떨리던 첫 마음을, 문턱을 넘기 힘들어하는 예술가들에게는 기웃거리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길 바란다. 올해 인큐베이팅 사업이 없어져서 아쉽다, 쩝.




사진ⓒ조수현





김옥진 / 마음놀이터 대표
오랫동안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살았습니다.
잠시 현장을 떠나 나의 어제와 내일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해지는 노을과 새들의 각기 다른 날갯짓을 바라보기를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것들과 오래도록 공존하기 위해 내 할 일을 찾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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