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의 시대,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무거운 생각”
최지만(인문예술센터)
덧없이 지나는 공감의 순간들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시간을 넘어가는 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어제 일을 특별히 기억하지 않아도 오늘을 사는데 큰 무리가 없으며, 우리에겐 아직 오지 않은 내일 만을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이 모순된 문장은 우리가 처한 상황입니다. 어제의 사건보다는 오늘이 없는 내일의 사건이 더 중요시되는 것이지요. 사회환경(Social Environment)의 변화 속도가 빠를수록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현재 시점에서의 고민(성찰 또는 사유)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공감지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지요.
미국의 역사정치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우리의 미래는 수세기에 걸친 견고한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덧없이 지나간 공감의 순간들에서 찾아질지도 모른다.” 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어떠한 공감의 순간들이 찾아왔습니다. 재난사회, 우울사회, 피로사회, 위험사회, 무한성장의 궤도에서 벗어나면 낙오되는 박탈의 사회 등 이러한 ‘소비적 양적사회(불안사회)’에서 개인의 창조적 삶이 다양해지고, 존중되며 사회적 연대를 통한 다양한 형태의 창조적 공공지대를 만들어나가는 ‘생산적 창조 사회’로의 변화욕구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중요성도 더욱 높아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독일의 문화부 장관 베언 노이만(Bernd Neumann)은 “문화와 문화교육은 한 사회를 유지하고 좀 더 가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중요한 사회적 유산을 후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화예술교육 또한 2000년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들 속에서 공감의 지점들과 변화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다양하고 많은 실험들이 있었으며, 정책적(2005년)으로 본격 시행되며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확대되고 있지요. 2011년 대한민국 세계문화예술교육주간에 발표된 “문화예술교육 정책비전에는 문화예술교육은 사회문제에 포괄적 관심을 가지고 사회통합에 기여하며, 사회문화적 문제해결의 솔루션으로서 문화예술교육의 맥락이 확대됨을 밝힙니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환경의 변화를 바라보며 문화예술교육은 변화(진화) 되어야함을 중요시 한다는 것 이지요.
그렇다면, 급속도록 변화되는 사회환경에서 문화예술교육은 어떤 고민지점을 갖으며 진화해 나가야 할 것인가?
문화예술교육의 본질적 고민지점은 현재적 삶의 질(顯在的 quality of life)에 있을 것입니다. 이는, 현재적 ‘삶의 질’을 결정하는 요소나 조건이 기존의 사회적 물질충족의 구성만으로 볼 수 없기에, 삶의 질을 결정하는 최소의 조건과 환경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논의가 지속적으로 필요한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점은 어떠한 조건에 의해 생성되는데, 그 최소의 조건(삶의 질을 구성하는 최소환경)을 사회적 삶의 조건(the society condition of life) 또는 필요환경(necessary environment), 전환환경(轉換, environmental transformation)을 고민하여 실험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즉, 문화예술교육은 보다나은 현재적 삶의 질을 위해 ‘어떠한 문화예술적 교육환경을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천착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이 환경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관계’ 라는 세 가지 요소를 다양하게 해석(이야기, 내용, 프로그램)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문화예술교육, 새로운 시간성에 대한 고민 : 느린 시간성의 확보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어느 한순간을 깊이 경험할수록 경험은 더 많이 축적된다. 그런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 경우 낭비로서의 시간의 흐름은 저지된다. 살아 있는 시간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와 밀도의 문제이다.” 라고 말합니다.
문화예술교육은 한정된 물리적 시간(기간)과 어떠한 ‘패턴(pattern)’을 설정하고, 이를 돌아가게 합니다. 하지만 동일한 조건의 ‘사회적 시간(흘러가는 시간)’과 더불어 개인의 ‘고유한 시간(멈춰있는 시간)’이 같이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이는 같은 시간의 조건에 있지만, 자신만의 질적 경험의 시간(몰입의 지점)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렇기에 주목해야 할 것은 ‘속도(speed, velocity pace)’의 지점입니다. 빠르게 흘러가는 동일한 시간조건 안에서 ‘어느 한 순간을 깊이 경험할 느린 시간성’을 어떤 방식으로 확보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것이 중요하다는 것 입니다.
존 버거(John Berger)는 현대인이 고민해야 할 ‘시간성’의 문제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시간이 공존한다. 수태되고 자라며 성숙하고 늙고 죽어 가는 시간이 그 하나라면, 의식의 시간이 다른 하나이다. 전자의 시간은 그것 자체로 자명한 시간이다. 동물들이 철학적 문제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반면, 후자의 시간은 시대에 따라 달리 이해되어 왔다. 의식의 시간에 대한 이해를 제시하는 것, 과거가 미래에 대해 가지는 관계성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여느 문명의 첫 번째 과제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예전의 우리 내 삶은 먹고 살기는 힘들었을지 몰라도 우리만의 시간과 방식으로 삶을 경험하며 즐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풍류(風流)’와 ‘낭만(浪漫)’이라는 단어가 익숙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느린 시간’은 어쩌면 그러한 시간이 가능했던 과거의 어떤 지점으로의 회귀본능(回歸本能, homing instinct)과도 같은 것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멈추어 있을 장소성(공간)의 회복
문화예술교육에서도 ‘공간’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사회적으로나 세대적으로도 장소성 또는 공간성은 우리가 처해 있는 지리적 특성상 연관성이 높을 수 밖에 없는 듯 합니다. 또한, 폐쇄된 개인들이 자신의 개인성을 노출할 수 있는 방식은 ‘공간적 표출’ 또는 ‘공간-안’에서의 표출로 이어지는 듯 합니다. 다만, 장소전략 또는 공간성이라는 형태가 사업화, 프로그램 소비화와 연결성을 가지면서 ‘소비 가치로써의 공간성’ 에 치우치는 경향이 높아졌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 ‘창의적 생산이 가능한 공간’이 아닌, ‘의도된 공간창출’이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문화예술교육에서의 공간성은 ‘무엇을 위한 공간’, ‘어떠한 과정이 이루어지는 공간성’인가에 대한 부분이 중요할 것입니다. 공간성을 삶의 터전의 한 지점으로 또는 어떠한 삶의 한 지대로써 놓고 보면 공간성은 삶의 큰 근간이 되는 부분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문화예술교육에서의 공간성은 ‘경험하지 못한 또는 잃어버린 공간성의 회복(함께 만들어 향유하는 과정에 대한 본능적 욕구)’이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 봅니다.
문화인류학자인 조한혜정 선생은 “나는 청소년 및 청년들에게 특히 마을살이를 권합니다. ‘경쟁적 자아’로 성장한 이들이 허망한 인정 투쟁을 벌이면서 무시와 모욕을 견디기보다 우정어린 만남을 통해 ‘사회적 근육’을 키우고 ‘협동적 자아’를 형성해 가기를 바랍니다. 예민한 신경을 건강한 신경으로 만들어 가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을에서 뒹굴며 함께 만들어 가는 경험일 테지요. 80년대 살벌했던 군부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창의적 공유 지대에서 밤새 토론하고 어울려 놀던 청년들과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공유한 것은 평등과 자유에 대한 신념이었으며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이제 그 깨달음은 서로를 돌보고 아끼는 ‘마을’을 중심에 둔 어떤 것 일겁니다.”
조한혜정 선생은 “마을이라는 장소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배우게 된다.”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 삶의 터전 과정 안에서 머무를 때, 생성되는 힘이 삶의 변화의 큰 동력원이 된다는 것이겠지요.
느슨하지만 지속적인 관계실험이 가능한 문화예술교육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는 그의 책『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에서 ‘인성’ 또는 ‘인가다움’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사회가 불안할수록 우리는 서로 도우며 함께 살 수밖에 없다. 부자들이야 담을 높이 쌓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면 되지만 대다수 돈 없는 이들은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 일상적으로 사람들과 느슨하지만 지속적인 관계를 쌓는 것, 그럴 수 있는 인성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가장 중요한 능력일 거라고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앞서서도 언급하였지만, 보이지 않는 압력과 억압에 의해 지속화 되는 불안사회는 무엇이 되었든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명료한 시스템이 필요해 진 듯 합니다. ‘시작과 끝’이 이렇게 빠르게 명료한 사회는 없었으며, 빠른 시간 내에 결론에 도출되어야 하는 다양한 시스템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말이죠. 우리는 이것에 익숙합니다. 그러다보니, 문화예술교육 또한 관계(연대)방식, 실험방식 등 한정된 시간조건과 공간성 안에서 제한된 어떠한 프로세스(process)와 시스템(system)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허나 이러한 방식은 대안을 제시하는 정도는 될지 모르나 변화의 촉발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합니다.
사회환경 조건이 삶의 변화지점을 가져오는 제약조건이 되는 부분은 있으나, 변화의 촉발을 불러일으켰던 사건들은 양적 관계가 질적 변화를 나타낸 지점들이었습니다.(촛불, 탄핵 등등) 그 핵심은 느슨하지만 꾸준히 가져온 삶의 관계형태, 그리고 그 본질적 부분은 ‘사람-삶-사람’ 사이의 ‘인간다운 삶’의 부분일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삶을 위한 변화의 다양한 실험들에는 이러한 느슨하지만 지속적 관계 형태, 그리고 인간다움에 대한 부분이 핵심적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아마도 인공지능(AI)이 도래한 시점이기에 그런 듯 합니다만, 보다나은 삶의 변화지점에는 여러 형태의 관계실험의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과정이 다소 지루하고, 답답할 수는 있지만, 이 또한 즐겁게 풀어나가는 실험이 필요하겠지요.
유럽연합의 경우 크게 세 가지의 문화정책 아젠다를 중심으로 삼고 있는데, 사회적 포용(social inclusion), 문화 간 대화(intercultural dialogue),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입니다.(홍종열, 2011). 이들 아젠다는 공통적으로 오늘날의 사회 환경 변화를 반영해 거기에 대응하고자 하는 경향을 드러냅니다. 사회적 포용(social inclusion)은 지식기반 사회에 대응해, 문화 간 대화(intercultural dialogue)는 다문화 사회에 대응해,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은 세계화의 흐름에 대응해 정책적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모두 사회적 관계망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형태입니다.
“숲 속에서는 비록 혼자 일을 할 때도 누군가가 함께 하는 듯한 뭐라 말하기 어려운 느낌이 든다. 편평한 들판, 벌거벗은 언덕, 초원 등과는 다르다. 나무들에게는 존재감이 뚜렷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에 따라, 움직임과 정적 사이의, 동작과 수동성 사이의 범상치 않은 균형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런 균형이 이루어지는 내내 그들은 뚜렷한 존재감을 유지한다. 나무들이 지붕을 그리도 오랫동안 지탱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연대(連帶)를 제공한다. 아주 무관심한 듯 진중히 함께 있는 연대다. 나무에 의해 드러나는 연대는 무관심이나 정의의 개념보다 더 오래 된 개념이다. 그들은 공간적인 연대를 제공한다.” 존 버거(John Ber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