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부르지?_김현주(A.C. 클리나멘 대표)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날짜 2019-09-06 조회수 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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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부르지?
: 노년에 예술하기의 의미와 경청을 통한 관계맺기

 


A.C. 클리나멘 대표 김 현 주


 내가 노인세대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아차도라는 작은 섬과의 인연으로부터 시작된다. 2012년 여섯 명의 동료들과 ‘섬’, ‘소리’, ‘지역공동체’라는 키워드가 담긴 프로젝트 ‘섬의 노래’와 인연이 될 만한 지역을 찾다가 만나게 된 아차도는 인천 강화군에 위치해 있는 작은 섬으로 외포리 선착장에서 약 1시간 30분 배를 타고 가야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황해도 염전이 보일만큼 북한과 접경해 있는 아차도에는 서른 두 가구에 마흔 세 분의 주민들이 어업과 농업을 겸하며 살고 계셨고 평균 연령 60세가 넘는 이미 고령화된 마을이었다.
 섬을 선정하는 데는 나름의 몇 가지 기준이 있었다.
 첫 번째, 문화예술 소외지로 주민 대다수가 문화예술적 경험과 혜택이 부족한가?
 두 번째, 프로젝트 기간 내 주민과 관계 맺고 소통하기에 마을 규모와 주민의 수가 적합한가?
 세 번째, 내가 사는 곳(서울)에서 지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다닐 수 있는 거리인가?
 네 번째, 섬의 지형적, 장소적 특징으로부터 고유한 ‘소리’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인가?
 생각에 따라 각 항목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아차도는 위 네 가지의 기준점들을 어느 정도 충족하고 있는 곳 이었으며 무엇보다 산을 등지고 파란 지붕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어촌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자 팀원 모두가 매료된 듯 이곳에 짐을 풀게 되었다.

 마을 주민 대다수가 한 낮의 노동도 모자라 밤에는 소라를 캐러 나가거나 새우를 잡기 위해 바다에 그물을 설치하기에 바빴고 새벽에 돌아와 겨우 쪽잠을 청한 후 다시 이른 아침이 되면 밭에 나가는 하드코어적 노동의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작은 마을이니 주민들을 한 자리에 부르고 마주하는 게 어렵지 않겠지 여겼던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 노동으로 가득한 노인들의 일상을 보면서 이 분들의 삶의 리듬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호락호락 하지 않겠다라는 근심이 들기도 했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 왔던 나는 섬에 머무는 며칠 사이 빽빽하게 계획해 놓았던 그 ‘무언가’들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리고 가방 안에는 녹음기와 펜, 노트만을 들고 주민들의 일터를 따라가기 시작 했다.
 아흔 넘어 등 굽은 노인이 종일 소라를 캔 노동의 무게와 바꾼 초경량의 돈의 가치에 한숨이 나왔고 새벽녘 쳐 놓은 그물에 새우만큼이나 가득한 쓰레기들을 거르는 일이 새우잡이의 또 다른 노동이 된 현실을 보는 것이 안타까웠다. 여전히 빛을 선사하며 인간에게 풍요를 주고 있던 바다의 속사정은 점점 더 줄어드는 어획량과 무법천지 버려진 쓰레기를 걸러내야 하는 어부들의 속사정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주민들에게 고된 삶과 노동의 현장인 섬은 반면에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낮의 빛과 도시가 잃어버린 밤의 어둠을 선사해주는 곳이기도 했다. 섬 곳곳에 자리한 풀숲들은 수많은 생명들의 마찰과 움직임, 마을 주민과의 공존을 빛과 소리로 끊임없이 표현하며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섬에 사는 노인의 몸에는 고된 노동의 주름뿐만 아니라 자연과 공생하며 만들어진 고유한 무늬와 색이 담겨져 있다. 노인의 주름은 단순히 노화에 의해 형성된 생물학적 변화이기 보다 한 생명체가 세상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들어낸 고유한 시간의 합작물이며, 살아온 생애를 시각화하여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인과의 대화란 접힌 주름 안으로 레코딩 된 한 사람의 생애를 겸허히 바라보고 그것을 펼쳐내고 경청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주민들이 잠자고 깨어나 노동하는 시간에 몸이 익숙해질 때 쯤 주민과 대화 나누는 시간이 제법 생기기 시작했다. 말린 옥수수를 떼어 내거나 고추를 따는 일상에서, 장시간 허리를 구부려 캔 고구마를 흙냄새가 가시기도 전 냄비에 쪄먹으며 휴식하는 동안 기대하지 못했던 선물 같은 시간들이 주민과 나 사이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같은 환경 속에 머물며 함께 일을 하고 음식을 나누는 것과 같은 소박한 일상을 따라가며 주민의 삶을 경청하는 일은 작업이나 예술교육에 앞서 내가 만나야 하는 사람들, 나와 함께 해야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질문하는 과정이자 찾아가 배우는 중요한 관계 맺기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관념적 예술 혹은 교육의 대상자로써의 주민을 만나는 것이 아닌 평등한 대화를 통해 온전한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려 애쓸 때 작가는 지역에서 주민과 무엇을 함께 할지에 대한 현장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수 있다.
 ‘무엇’을 하지 않으면서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었던 아차도 프로젝트는 여전히 현장에서 내가 지역민을 만나 무언가를 할 때 관계 맺기의 과정과 경청하기의 태도의 중요성을 환기하게 하는 지침서 역할을 한다.

 70대, 80대 노인들 중 많은 분들이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었고 10대 혹은 그 보다 더 이른 나이에 혼자가 되어 삶을 연명해야만 했다. 나는 종종 이들 노년 세대와 소통하고자 할 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임을 종종 느껴왔다. 이들의 굴곡진 삶과 주름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눈으로 보이지 것 너머에 존재하는 한 사람의 삶을 주목하여 미시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다. 한국현대사를 몸소 겪은 노인세대들의 몸과 기억은 거시사라는 큰 강물 뒤로 끊임없이 흐르는 보이지 않는 작은 샘물과도 같다. 작은 샘물들의 이야기 즉 노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기억하는 거시사가 외면해온 소외된 주체들의 역사이자, ‘우리’라 일컫는 집단의 통념으로부터 ‘우리는 누구인가’라고 반문하는 보이지 않는 주체들의 이야기이다. 지역에서 노인세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일은 도시와 현대라는 큰 지형 속에서 잃어버린 ‘나 그리고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본질적 자문과 함께 제대로 대면하기 어려웠던 사회의 이면을 새로운 시각으로 마주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렇듯 노인의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경청할 필요와 가치가 있으며 노인들에게도 그들이 살아온 삶을 풀어낼 수 있는 다양한 문화예술적 경험과 기회의 장이 필요하다.

 전쟁 이후 지독한 가난과 노동을 감내하면서 살아온 지금의 노인 세대들은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나’보다는 누구누구의 아들로, 며느리로, 엄마, 아빠로 불리어진 세대이다. 이런 지점에서 이들에게 예술이란 가족과 사회라는 굴레와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자리를 내주고 밀려나야만 했던 바로 ‘자기 자신’을 불러 세우는 일이며, 내가 누구인지 예술하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더듬어 고유한 이름들을 발견해내는 일이기도 하다.
 뭐든 새로운 것이 낯설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던 분들도 막상 예술 활동을 시작하면 자꾸만 나의 이름이 호명됨이 기분 좋고 뭉뚝해진 손끝이 낯설게 움직이는 것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나는 종종 노인들만이 가진 고유한 표현들에 감동을 받곤 하는데 노인들은 예술 활동의 결과물에 대한 부담을 갖지 않으며 과정의 의미와 즐거움만으로 충만하다. 비장미 없음과 삶의 고난을 생색내지 않는 노인 고유의 소박한 표현들은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감동을 준다. 그들에게 예술이란 어떤 명분을 찾을 이유가 없는 것이 예술이며, 어떤 장치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움이 예술인 것이다. 노인들이 표현하는 일련의 시와 그림에는 여유로움과 자연스러움, 어떤 삶이든 버티고 겪은 자만이 표현할 수 있는 진실됨이 있다. 그래서 나이듦의 예술이란 수식어가 필요 없는 살아온 삶 그 자체, 노인의 몸 그 차체가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 한다.

 

 ‘이게 예술이야? 이게 예술이네.’
 ‘들어줘서 고마워.’
 ‘계속 하고 싶다.’
프로젝트가 끝날 때 쯤 종종 벗이 되어준 노인분들이 해주신 말씀들이다.

 마지막으로 ‘섬의 노래’프로젝트를 통해 만나 즉흥시를 주고받으며 벗이 된 최재석님의 시 ‘누가 부르지’를 소개한다. 카메라를 습관적으로 들고 다녔던 나를 몹시도 거북해 하셨던 분이셨는데 나중에는 직접 카메라를 잡고 기록하는 일을 도와주셨고 내가 찍어드린 부부의 사진을 보며 기뻐하셨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꿈이 시인이셨다길래 잘 쓰지도 못하는 시를 잘 쓰는 척 하며 밭일 사이사이 최재석님과 ‘시 배틀’ 놀이를 했었다. 즉흥으로 문장을 주고 받으며 하나의 시를 써내려가는 대화 퍼포먼스였는데 이때 즉흥시 쓰기 놀이는 최재석님에게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된 계기가 되어 이후 자신만의 시를 쓰며 시집도 내게 되신다. 요즘도 최재석님은 좀 더 나은 시를 쓰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 육지에 나가신다. 겨우 하루에 두 번 오가는 배에 몸을 싣고 육지에 나가 저녁까지 배움을 마무리하고 나면 배편이 끊겨 여관 신세를 져야 하지만 그런 불편함보다도 예술하기의 기쁨이 더 큰 것이다.
 하루하루 무료하게 노년을 보내는 노인세대들에게 예술이란 잃어버렸던 다양한 선택의 즐거움과 자유로움을 맛보며 ‘취향’을 되찾는 일이자,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스스로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나이듦의 시간이 어쩔 수 없거나 무기력함을 버텨야 하는 통증이 아닌 스스로 나이듦의 의미를 찾아가는 구체적 행동이다. 길을 배회하거나 방 안에 앉아 홀로 고독하게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너무나 많다. 그들의 잊혀진 이름을 뒤늦게나마 호명해주고 무디어가는 손끝과 감각들을 다시금 생동감 있게 움직일 수 있도록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바로 예술뿐이다.

 


     누가 부르지

                      최재석

    아버지의 아들이었다가       
 매형의 처남이었다가      
​아우의 형이었다가        
    아내의 남편이었다가          
    손주의 할아버지다             
    어려서는 구분하기 쉬우라고
    내 이름 잃어버리고            
    나이 들어서는                   
    어른 이름 함부로 부르기     
    어려워서 잃어버리고          
    부르라는 내 이름               
    친구마저 아니 불러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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