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사태’에 어떻게 ‘감응(感應)’하고 있는가? - 김천응(청소년문화의집 야호센터 교육실장)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날짜 2020-08-05 조회수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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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사태’에 어떻게 ‘감응(感應)’하고 있는가?


 김천응 (청소년문화의집 야호센터 교육실장)

 

 
트렌드는 인간의 무늬人紋이다.


‘현재 문화 트렌드를 읽어야 미래가 보인다’라는 주제로 칼럼 요청을 받았다.
지난번에는 광주를 잠시 떠나 있다는 사뭇, 타당한 핑계로 당당하게 사양했지만 이번에도 거부한다면 작은 동네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조심스레 수락을 했다.

 

아뿔사! 이내 문제가 생겼다. 주제를 안물어보고 수락을 한 것이다.
보내준 주제를 나중에 받아들고 보니 이건, 낭패다. ‘트렌드’라니. 거기다가 ‘미래’까지.
아, 이런 주제로 글을 쓰고 싶을 때는 따로 있었다. 한참 GQ의 에디터 이충걸 선생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언어를 사랑하여 그의 책을 사들여 읽고 있을 때, 카페에 가면 구비된 최신 잡지들(Vogue, Elle, Marie Claire 등등)을 3~4권 씩은 재미있게 훑어볼 때, 나의 패션을 셀렉 하기 위해 3~4 군데의 가게들을 기꺼이 순례한 후에야 최후의 선택을 해내던 지구력이 있을 때, 한 달에 3~4번은 이름하여 ‘시내’에 나가 문화예술계의 지인들과 어깨를 바짝 맞대고 앱솔루트 보드카 칵테일을 마시던 그때! 였다면 ‘트렌드’에 대한 이야기를 쬐금이라도 ‘간지’나게 할 수 있었을텐데. 삶의 모든 사태는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일어난다. 이제는 몇 달이 지나도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일이나 시내에서의 약속도 없고, 혼자만의 공간에 틀어박혀 애꿎은 차茶나 축내고 있는 나에게 이런 주제는 이미 지나‘간지’ 오래인 것만 같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고 시무룩해진 상태로 노트북을 연다.
언제나 그렇듯 일단 공부와 글쓰기의 정석을 밟기로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시작하라.’ 국어사전에 ‘trend’를 입력한다. 
트렌드(trend) - 일단 씌여진 단어와 발음기호가 똑같다. (난 개인적으로 이게 맘에 든다. 모든 영단어가 이러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상이나 행동 또는 어떤 현상에서 나타나는 일정한 방향’이라고 알려준다. 오~ 구원의 빛이 희미하게 한줄기 비추는 것 같다.

그래! ‘트렌트’란 (최신)‘트렌드’ 이런걸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구나. ‘트렌드’란 ‘인간들의 사상이나 행동 또는 현상의 일정한 방향의 결’이구나, 결은 ‘무늬’를 말하는구나.
그러니까 결국, 트렌드란 ‘인간들이 그려내는 무늬’ 즉, 인문人紋인거야. ‘고대, 중세, 르네상스, 근대, 현대’ 우리 모두가 공교육의 은총을 받아 알고 있는 선명하고 굵직한 이 무늬들이 바로 ‘트렌드’인거지. 내 안의 물음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인간의 트렌드, 즉 인간의 무늬, 인문人紋은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 ‘결’과 ‘무늬’를 직조해내는 낱낱의 실날들은 무엇일까?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다가오는 일상 속 ‘사태’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있다.
삶의 사태들은 마치 문밖에 서서 다급하게 노크를 해대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과도 같다.
기실, 우리네 삶이라는 게 이 사태들에 어떻게 반응하고, 사태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응답하고 해결하는지의 연속선상에 터해있음이 틀림없다.
이 사태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결’과 ‘무늬’- trend - 가 인류의 역사가 되는 셈이며, 이를 공부하고 살아내는 일이 곧 인문人文일 터이다.

 

 

2020년에 ‘그려진 무늬’ - trend

 

2020년 올해의 시작은 유난히 큰소리로 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예기치 못한 손님맞이로 시작되었다. 게다가, 그 사태는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중이며 우리로 하여금 사태에 대한 반응과 해석과 응답을 아직도 요구하고 있다. 사태의 초기에는 불안, 공포, 혐오와 더불어 마냥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랬지만, 이제는 그 사태가 곁에 엉덩이 털썩 깔고 앉아 아예 한 자리를 차지하고야 마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얼떨떨하던 혼란의 시간도 지나 이제 우리는 분명히 안다. 그 사태의 원인이 도시화, 문명화, 금융화를 추구하느라 욕망의 포크레인으로 어머니 자연의 고운 흙가슴을 마구마구 갈아엎고 파헤친 결과라는 걸.


그 결과에 따른 혹독한 댓가는 여기서 또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며 우린 깨달았다. 올해 닥쳐온 이 사태는 우리들에게 뜻하지 않은 (아픈)선물들도 안겨주었다는 걸. 야수자본주의의 폭주기관차를 잠시 멈춰 세웠고, 승객들인 우리들도 열차에서 내려야 했으며, 좁은 폭주기관차의 좁은 객실에서 너무 가까웠던 사이들에 ‘거리두기’를 명命받았다. 더불어, 지나온 삶의 행태에 대한 성찰을 하게 했으며, 수십 년 후에나 가능할거라 하고 상상만 하고 있었던 급진적 논의들이 눈앞에서 구현되는 걸 목도했고,(이런 시도를 해도 별일 안생긴다는 경험을 한 셈이다) 무엇보다 인간들의 시끄럽던 욕망의 폭주기관차가 멈춰선 덕에 실로 오랜만에 어머니 자연이 평온한 단잠을 자며 쉼과 회복을 누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놀라운 선물은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고, 추앙해왔던 것들이 얼마나 허위로 가득한 우상이었고 우리 사회의 취약점이 무엇인지를 직시하게 해준 일이다. 오죽하면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했었다. ‘정말, 코로나가 지능이 있는 것 같지 않아?’ 우리는 맹목적 신화에 길들여져 있었다.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들을 열심히 따라가는 것이 최선이고, 신자유주의가 주구장창 부르짖는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안정이 가능하리라는 믿음말이다. 코로나 19 사태는 그 허위를 낱낱이 드러내 주었다.
 


trend는 ‘재난’이고, future는 ‘몰락’이다.

 

에둘러 가지말자.
현재의 트렌드는 ‘재난’과 ‘재앙’이고, 그걸 읽었을 때 보이는 미래는 ‘한계의 직면’과 ‘몰락’이다. 더 이상의 안정과 성장을 바라지도 말자. 당장 우리들부터 그리하자. 그동안 너무 많이 썼고, 너무 많이 먹었고, 너무 많이 소유했고, 너무 많이 확장했다.
몰락의 징후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고, 묵시록의 비장한 장면을 보기 위해 더 이상 영화관에 갈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30도가 넘는 기온에도 외출을 할 때면 겉옷처럼 마스크를 챙기고, 마스크를 내리고 친구와 가까이서 얘기했다고 혼났다는 이야기를 하며, 언제 학교가 문을 닫을지 모르니 전과목 교과서를 가방에 잔뜩 챙겨넣고 축처진 어깨로 학교를 가는 쌍둥이 아들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죄를 저 어린 양들이 잔뜩 짊어지고 사는 것 같아 아내와 난 죄책감에 휩싸인다.
유발 하라리가 그의 두꺼운 책에서 다가올 미래를 이야기하며 사뭇 비장한 어조로 “현명하지 못한 결정의 대가는 인류 자체를 소멸에 이르게 할 것이다. 현명한 선택을 하느냐 마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라고 경고했던 시기는 2017년의 화사한 봄이었고, B.C(Before Corona)시대의 이야기였고, 이젠 A.D(After Disease) 시대이다.  
생태학자인 최재천 박사가 이번 사태로 제인 구달 박사와 수시로 연락을 하던 중 서로가 나누었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해준다. “어쩌면 이번에는 사람들이 계산 제대로 할지 모른다.”
정말 우리의 생生이 남아있는동안 이런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런데, 어쩐담. 아직 사태의 소용돌이가 지나가기도 전에 경제의 ‘V자 반등’을 운운하고 있는 이 작태들을 말이다.

 

재난과 재앙은 영어로 ‘disaster’이다.
이 말은 astral(별)이 dis(떨어져) 버렸다는 뜻이란다.
아! 짙은 어둠 속에서도 유일하게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별이 사라졌으니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보다 더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는 이야기도 들린다.
1:29:300 하인리히 법칙이다.
재해가 발생하여 사망자가 1명 나오면 그 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한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그와 관련된 수십 차례의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징후들이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을 뜻하는 통계적 법칙이다. 맞다. 돌이켜보니 그랬었다. 수많은 전조와 조짐과 징후들이 분명히 있었다. 300번은 족히 넘게. 하지만, 고장난 우리들의 ‘센서sensor’와 퇴화된 ‘감응感應능력’이 작동을 하지 못한 채, 전조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조짐과 징후를 읽지 못했다.
이 이야기를 듣다가 순간 무서운 생각이 엄습했다. 지금의 이 사태가 과연 종착점인 ‘1’일까? ‘1’과 ‘29’에 가까이 근접하고 있는 ‘26’이나 ‘27’이라면... 아직 ‘1’이 오지도 않았다면? 
엄밀하고 정밀하다는 과학이 예측해내고 있는 가까운 ‘미래’는 이 두려움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반증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를 어찌할꼬.

안다. 낙관을 해도 견뎌내기 힘들 판국에 이런 이야기들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특히나 사태의 파장이 직접적이었기에 여전히 힘든 문화예술계의 동료들과의 이야기에서.
맞다. 정말, 참으로, 이 글을 긍정적으로 끌어가고 희망적으로 끝맺고 싶었다. 몇 년 전 열심히 배우러 다녀온 북유럽 4개국 문화예술교육의 앞선 모습을 이야기할까도 생각했고, 조금만 더 힘을 내고 집단지성의 힘으로 지혜를 모아보자고 말하고 싶었고, 이 사태 속에서도 ‘해석과 창조’를 해내는 예술가들과 정책들도 소개하고 싶었으며, 레베카 솔릿의 말을 빌어 ‘이 폐허를 깊이 응시’하고 문화예술교육의 힘으로 ‘재난유토피아’를 시도해보자고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 막 몰락의 사태 초입길에 들어서있음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사태에 대한 용기있는 직시와 올바른 해석이 없이는 다음 발걸음을 내딛을 수 없지 않는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현실의 사태속에서 무엇을 이야기해야할까?
나는 ‘감응感應’하는 능력(맞다, 실로 이건 ‘능력’이다)을 호출하고 싶다. 생生의 시간표속에 문화예술교육과의 인연을 이어가야할 나 자신과 여러분들에게.
‘감응感應’은 지난 인류의 무늬人紋 가운데 일찍이 옛 스승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덕목이며 능력이었다.

 

 

“우주는 본시 감응感應, 즉 다양한 에너지들이 상호교호하고 넘나드는 우주적 무도의 장場 같은 것이다. 신호가 오면 받고, 신호를 주면 또 돌아온다. 사람과 사람사이, 사람과 일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가 그렇게 프로그램되어 있다. 그 또한 거창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일상적 경험의 지평 위에 있다. ··· 이 교감을 주자학은 인仁이라고 불렀고, 그 우주적 능력이 마비된 것을 불인不仁이라고 불렀다. 불인은 한의학에서 수족의 ‘마비paralysis'를 일컫는 말이다. ··· 그때, 마음의 마비가 풀릴 때, 인간은 연비어약, 연못을 뛰노는 물고기, 하늘을 솟구치는 소리개처럼, 혹은 길거리에서의 어린아이처럼 본연의 생명의 교감을 자발적 자연으로 발휘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 <조선유학의 거장들>, 한형조, 문학동네 中에서 -

 


 

시詩, 서書, 화畵 같은 깊은 예술행위로 일상에서 수양하며 ‘항심恒心’으로 살았던 옛 스승들은 인간에게 필요한 중요덕목으로 ‘감응感應’하는 능력을 손꼽았다.
그걸 해서 뭘 하게? 이들은 이 능력을 키워 인간의 삶과 시대와(트렌드), 사회가 나아갈 미래를 묻는 ‘책문策問’에 ‘책문策文’으로 답하여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나갔다.

 

이제 우리가 더욱 예민해지자. 충분히 예민한지 안다. 그러니 더욱 예민해지자.
그러기위해 감응(感應)하는 능력을 더욱 길러내자. 그 옛날 스승들이 시, 서, 화로 자신들의 센서와 감응능력을 갈고 닦았듯이 우리도 읽고, 쓰고, 그리고, 만들고, 기획하고, 창조하는 일에 더 열심을 내자.
그리고 할 일을 하자. 하지만, 이전처럼은 하지 말자.
온갖 생명을 죽이면서 축제라고 명명하는(산천어, 전어, 주꾸미, 더 말해 뭣하겠는가?), ‘죽임의 윤리’가 부재한 싸구려 축제 비슷한 것들도 그만하고, 이제 어차피 많이 못 모이니 인원과 물량이 대거 투입되어 엄청난 쓰레기를 양산하는 대형행사도 그만하자. 이번기회에 성과중심적 사업과 기획에서도 조금 멀어져보자. 문화예술을 등에 업고 자신의 힘과 소유를 과도하게 키우는 일도 그만하자.

 

대신, 한 사람을 위한 문화예술교육과 소규모단위의 밀도 있는 문화예술교육, 소외된 계층과 마을 안 구성원들의 공동체성과 생生의 의미 경험(‘체험’이 아니다)이 가능한 문화예술의 장場을 더 많이 만들자. 더 나아가 미증유의 ‘몰락의 시대’를 힘들어하고 상처받을 시민들을 위한 적응유연성과 회복탄력성에 관한 문화예술교육을 연구하고 기획하고 실천하자.

안그래도 다들 예민하다는 핀잔을 듣고 살았을터이니 더 민감하고 예민해진다고 큰 차이가 있겠는가? 그런 다음 이웃들의 둔감해지고, 먼지가 끼고, 고장난 센서들을 다시 작동하게 해주자. 그리고 혹시 기대해보자. 서로간의 ‘떨림’과 ‘울림’ 그리고 ‘되먹임’들이 우리의 몰락을 조금은 늦출 수 있을거라고.

 

 


           <영화 ‘타이타닉’ 중에서>
                                                 


다들 이 영화를 보았을 터이다. ‘거대한 배’가 침몰하고 몰락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말이다.
길고 긴 대서사의 마지막 장면이 기억나는가? 그 ‘예술가들’.
나는 이 장면이야말로 문화예술과 인간 삶의 고귀함을 압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배가 침몰해가고 모두가 자신의 한 목숨을 구하기 위한 아비규환과 아수라장이 펼쳐진다.
“이제 우리도 가야하지 않을까요?”
바이올린 연주자인 ‘윌리스 하틀리’는 동료의 물음에 대답한다.
“남아서 사람들이 더 안정되도록 조금만 더 연주해주도록 합시다.”
시간이 지나 윌리스 하틀리만이 홀로 남아 사람들을 위해 끝까지 연주를 이어간다. 이를 본 동료연주자들이 하나둘 다시 마지막 연주에 합류한다. 침몰하는 배 위에서 예술가들의 선율이 울려퍼진다. 마지막 연주를 마친 윌리스 하틀리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오늘밤의 연주는 저에게 있어 특권이었습니다.”

 

재난의 풍경이 일상이 되고, 재난이 트렌드인 세상에서, 몰락의 운명이라는 거대한 배를 타고 있는 승객들에게 문화예술교육의 선율이 한 줄기 위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글쓴이 김천응은,
 지난 15년간 어린이, 청소년, 청년, 성인들을 만나 함께 읽고, 쓰고, 사유하는 인문공부를 하고 있으며, 인문성을 바탕으로 한 ‘창조적 불화’의 힘을 키울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창작과 기획을 하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협업을 하고 있다. 지금은 잠시 인문사유, 예술경험으로 특화된 청소년문화의집 ‘야호센터’에서 머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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