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융합으로 미래를 보다
조인호(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인류문명을 진화시켜 온 가공 혼합의 역사
1997년 제2회 광주비엔날레 때 ‘지구의 여백’이라는 대주제 아래 현대문명을 진단‧제시하는 본전시의 다섯 소주제의 하나로 ‘혼성(Hybrid)’을 들었다. 다섯 소주제는 동양의 전통적 오행사상을 현대사회에 대입해서 풀어낸 개념으로 ‘수(水)-속도, 화(火)-공간, 목(木)-혼성, 금(金)-권력, 토(土)-생성’이었다.
당시 ‘혼성’ 소주제의 기획을 맡았던 커미셔너 리차드 코살렉(Richard Koshalek)은 전시도록 글에서 “(유전자 변이체 등) 새 종자의 필요를 인식하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학자처럼 ‘혼성’ 미술가는 낡은 패턴을 깨고 미술이라는 분야의 경계를 확장시키는 “혁신자”이다.“라고 하였다. 현대사회에서 ‘Hybrid’는 서로 다른 요소나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교접 합성하여 또 다른 변종을 만들어내는 생명과학 또는 하이테크산업의 무한세계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세계 곳곳에서 경쟁적인 실험과 투자로 수많은 유전자변형 동식물들이 등장했고 인공지능 기계장치들이 인간 삶의 범위와 가능성을 무한히 넓혀가는 중이다.
본래 그대로의 ‘자연’과 대치되는 변종‧변이의 혼성문화 확산은 우려와 기대가 뒤섞인 문명사적 ‘이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는 계속해서 성과와 확산이 이어지면서 어느 새 인류의 미래를 더 풍요롭고 무한대로 열어줄 지혜의 열쇄로 여겨진지 오래다. 세상을 연결하는 정보망의 급속한 팽창으로 관련 지식뿐 아니라 타분야 이론과 전문가들과의 접속이 훨씬 빠르고 폭넓게 진행되면서 이후를 전망하는 것도 불확실하다. 거기에 인공지능의 결합‧대체가 경이로움과 두려움 속에 확장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서양의 기독교계 세계관에서도 태초에 어둠과 먼지만이 가득한 ‘혼돈(Chaos)’의 상태였고, 말씀과 빛으로 비로소 세상의 질서가 잡히면서 인간을 비롯한 세상만물이 생성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동양 노장사상에서도 우주의 근원은 모든 것이 비어있고 불확정 상태인 허(虛)와 무(無)이며, 이를 바탕으로 세상만물이 무한 생멸순환을 거듭한다고 보고 있다. 인류 문명사는 자연 그대로의 채취나 이용 이상의 풍요와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 서로 다른 소재들을 가공‧결합하고 변형시켜온 탐구의 축적이다. 두려움 대신 필요욕구와 의지에 따라 활용 가능한 소재와 영역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변형이 새로운 문화와 창작예술을 열어 온 것이다.
장르와 개별재능을 넘어선 지혜‧감성‧기술력의 융합
수천 수백 년을 지나서도 여전히 경외의 대상인 인류 문화유산들은 대부분 여러 천연 요소들을 가공 연마하고 짜 맞추어 상상을 실현시켜낸 성과들이다. 서구 중세성당이나 고성, 한국 전통건축이나 도자기 등등 무엇 하나 원상태 그대로 또는 단독인 것은 없다. 또한 서로 다른 음색들이 어우러져 환상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합창이나 협연은 독창성이 돋보이는 개별공연과는 다른 깊이와 감동을 준다. 개별 인자와 생각과 재능들이 섞이고 맞춰지고 어울리면서 일차적 목적인 실용성이나 장엄‧장식 이상의 미적 가치로 문화예술 명품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 섞이지 못한 고독가나 기발한 천재, 일심집중 구도의 외길을 걸은 예술가에 의한 걸작들도 없지 않다. 하지만 자기시대와 교감하며 일반화된 기성문화를 넘어선 또 다른 세계를 개척하고 창조해낸 선도자들이 예술의 역사를 이끌어 왔다. 색채학과 광학과 사진기술이 도회미감과 결합되
면서 ‘인상주의’ 화풍이 등장하게 됐고, 유럽을 뒤덮은 세계대전의 암울한 시대상황으로부터 정신적 돌파구를 찾던 시인과 음악가, 화가들이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를 아지트 삼아 기존관념을 넘어선 엉뚱한 시도와 파격행위를 감행하여 현대미술에 일대 전환점을 만들어낸 ‘다다이즘’도 그렇고, 무용‧음악‧미술 서로 다른 분야지만 자기영역에 매이지 않는 협업과 융합으로 기존 개념이나 활동방식의 틀을 깼던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과 죤 케이지(John Cage)와 샤롯 무어맨(Charolotte Moorman)과 백남준의 전위예술 등등이 그런 예들이다.
▲ 2017년 베니스 Punta della Dogona에서 열린 데미안허스트의 믿을수없는 난파선의 보물 전시 일부
2017년 베니스비엔날레 기간에 대형 전시장 두 곳에서 동시에 열렸던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의 ‘믿을 수 없는 난파선의 보물’ 전시는 새삼 협업과 융합의 힘(자본의 뒷받침까지)을 실감하게 하였다. 고대와 현대의 경계를 넘어선 무한 시간대, 고고학과 해양생물학과 금속학과 영상영화와 인문사회학과 현대미술이 융합된 이 전시는 몇 년에 걸친 제작기간과 대형 전시장소, 압도적인 작품의 물량감 이상으로 거대한 상상의 신세계를 보여 주었다.
‘미디어아트’는 광주가 순수 예술만이 아닌 도시 문화산업 차원까지 내다보며 정책적으로 키우려 하는 기대주이다. 기존의 회화나 조각으로 활동하던 작가들도, 전자공학이나 영상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전문기술인도 자기분야 지식이나 경험만 고집할 수 없는 이 미디어아트는 예술과 광산업과 기계공학과 전자공학 등등이 결합되어 또 다른 융복합예술을 펼쳐가고 있다. 2010년에 창립전을 열었던 ‘빛예술연구회’도 비록 서로가 기대했던 성과를 얻지는 못하고 중단되었지만 미술작가들과 광산업 업체들이 소재나 기술력, 창의력
을 도움 받으며 미디어아트 창작과 산업적 부가가치를 높여보려는 시도였다. 이후 개별적인 연구 실험과 더불어 과학기술원이나 대학, 현장기술력들과 협업을 확대하며 몇몇 작가는 독자적인 미디어아트의 세계를 다져놓기도 하였다.
▲이이남의 미디어아트와 합창공연이 조화를 이루었던 2018광주비엔날레 개막식
특히 동‧서 고금의 명화와 현실‧가상을 융합시킨 시공초월 미디어영상을 모니터부터 대규모 파사드나 행사공간까지 펼쳐내는 이이남, 발광다이오드와 디지털 빛을 현대무용과 공연무대 연출 또는 건물외벽 대형 파사드 영상으로 엮어내는 진시영, 비정형 추상회화와 뮤직비디오‧영화적 요소를 결합시켜 열린 시공간의 영상을 연출하는 신도원, 일상풍경과 자연초목 숲을 한 화면공간 속에 중첩시켜 관람객이 그 사이로 소요할 수 있는 영상공간을 설치하는 박상화, 자연생명과 전자문명의 혼재를 디지털 광소재와 입체 설치로 조합하는 정운학을 비롯, 올해 7월 광주과학관 광장에 25m 높이의 거대한 키네틱 미디어아트 조형물을 설치한 손봉채의 <스페이스 오디세이>도 여러 장르와 미디어아트, 예술과 전자‧과학기술의 융‧복합으로 창출해낸 좋은 예들이다.
발상과 시도를 넓히는 창조적 문화예술 환경
▲ 미술과 건축 , 창의력과 협업, 놀이프로그램의 융합마당이었던 어린이목수축제
광주비엔날레 전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으로 병아리떼 꼬마관람객들은 주변 어른들을 흐뭇하게 한다. 관념에 굳은 기성세대보다 때 묻지 않은 새싹들이 예민한 성장기에 신선하고 실험적인 예술작품들을 자주 접함으로써 문화감각이나 창의력을 풍부하게 키워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들일 것이다. 그런 꼬마들과 10대 청소년들이 20여년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어느덧 ‘비엔날레 키즈’(biennale kids)가 되어 이 시대의 주역이자 활력소로서 이전 세대와는 확실히 다른 예술세계들을 펼쳐내고 있다.
요즘은 물리적, 지리적 거리와 상관없이 실시간 정보소통과 활동교류가 활발하고, 넓고 촘촘하게 엮어진 온‧오프 관계망으로 예술창작활동과 공유도 무궁무진 확장되어가고 있다. 작가들도 기존 재료나 표현법을 유지하기도 하지만 거기에 신소재나 다른 분야 기술력과 특성을 차용 또는 융합하기도 하고, 본래 전공이나 이전 활동에 얽매이지 않고 작업의 폭을 넓히기도 한다. 창의적 발상이 새로운 예술의 싹이 되는 만큼, 현상 너머나 이면까지 들여다보는 마음의 눈과 상상력은 불특정 자극원들을 자주 접할수록 창작의 토양으로 풍부해질 것이다. 창작에서 상상력과 의외성은 새로운 소재나 환경, 낯선 문화가 촉매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학교 밖 프로그램 또는 방과 후 활동이란 것도 매뉴얼화된 기본과정들 외의 다양한 접촉과 자극, 체험기회를 넓히는 별식 같은 것이다. 시대의 유행이나 집단양식과는 다른 개별 창작세계도 기존 틀을 벗어나려는 탐구욕과 과감한 시도로 실현되어질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COVID-19 Pandemic)은 기존 사회적 체계나 문화풍토, 관습과는 다른 방식의 예술창작과 공유방식을 찾도록 하고 있다. 실물친견이나 현장교감과는 다른 문화‧예술활동까지 폭을 넓혀야만 하는 반 강제된 환경변화 과정일 수 있다. 늘어가는 다매체 다자간 융‧복합 환경에 어떻게 대처하고 선도해갈지가 새삼스런 숙제는 아니지만, 그러나 예술은 지식정보나 전자기술력, 기계적 매체효과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측정분석 불가의 세계이다. 예술에서 감성은 이성적인 사유와 성찰에 깊이와 교감력을 더해준다. 창작자의 사유와 지혜, 창조적 상상력, 감성과 오감의 통감각을 바탕으로 신문화와 시대환경을 융합시켜 바이러스나 인공지능 세상에서도 예술의 고유한 인본가치를 키워가는 일이 창작의 과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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