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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일상의 민주주의를 북돋는다.
임승관(인천시민문화예술센터 대표)
일상과 멀어진 예술
르네상스 시기 신으로부터 독립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이성을 대면하며 근대 예술을 탄생시켰다. 그 후 예술은 화려한 변화와 성장을 하며 발전했다. 하지만 예술은 일상으로부터도 멀어지고 높아만 졌다. 근대 예술은 완벽을 추구하며 예술을 위한 예술 그리고 이를 위한 일상만이 의미가 있었다. 필자가 이 일을 과거로 표현하는 이유는 일상을 위한 예술이 새롭게 부상했기 때문이다. 생활예술이다.
일상은 삶이며 삶을 지속하는 동력은 관계다. 모든 사람은 행복과 보람 슬픔과 고통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느끼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심각해지는 다양한 사회문제도 대부분 사람과의 갈등이다. 물질적 결핍에서 오는 경제지표 같은 사회문제는 재난 지원금이나 복지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지속하는 높은 자살률¹이나 낮은 삶의 만족도, 더군다나 지금 세계보건기구(WHO)가 말하는 ‘코로나 우울’같은 ‘전례 없는 정신보건 위기’는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문제로 원인이 다르다. 관계의 복원 즉 공동체 회복이 시급하다.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나 공동체를 숲에 비유한다. 나무 하나하나가 모여 이룬 거대한 숲이 사람들이 살아가려는 건강한 사회와 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숲은 사실 흙과 나무, 햇빛과 물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생태 과학자 수잔 시마드 교수는 “숲은 나무들을 연결하고 소통하게끔 해 마치 지능이 있는 유기체와 같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보이지 않게 짜인 거대한 연결망으로 소통을 가능케 하는 박테리아와 그 역할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도 사람이 충분히 모여 있다고 건강한 공동체나 사회를 이루는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 것과 같다. 소통이 가능한 촘촘한 연결망이 살아있어야 한다.
일상을 위한 예술
그동안 공동체 예술(community art)이나 사회예술(social art)로 활동하는 작가들에 의해 사람들 간 공감적인 소통과 민주적이고 협력적인 관계를 북돋는 작업은 있었다. 하지만 점점 치열해지는 경쟁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제되며 고립감을 느끼는 개인들은 그런 작가나 기회를 기다리기보다는 직접 실행해 보기를 선택했다. 자유로운 표현, 수평적인 소통, 민주적 합의 과정을 만들어 참여하며 자율적 협동을 경험하고 협력적 진화에 내적 동기를 만든다.
후안 카밀로 카르데나스(Juan Camilo Cardenas)의 2005년 ‘공유지 게임’ 실험²에서 의미 있는 대면소통의 효과를 밝혔다. 게임은 참가자들이 어떤 규칙에서 스스로 이타적인 선택을 하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그중 가장 높은 효과를 본 규칙은 게임 후 참가자들이 모여 이번 판에서 누가 이기적인 선택을 했는지 밝히고 비난(응징)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같은 효과를 보인 다른 규칙이 있었다. 누가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지 알리지 않고 그냥 게임 후 서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만 나누는 규칙이었다. 대면 소통을 통해 합의한 약속(제도)에 대한 신뢰, 그리고 무임승차 행위를 최대한 억제하고 있다는 신뢰는 구성원들의 이타적인 협력 가능성을 높인다.
생활예술 활동은 누구나 평등하게 크고 작은 현안에 대해 의견을 표현하고 논의에 개입할 수 있는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즐거운 생일 축하 준비부터 봄맞이 소풍, 정기발표를 위한 복장 결정, 대관과 비용마련 등 누구나 참여하고 개입할 수 있다. 도시재생이나 참여예산, 사회적 경제, 주민자치회처럼 논의나 합의에 필요한 전문지식이 필요 없다. 이렇게 공감적인 대화와 상대방에 대한 긍정적인 되먹임(feedback)은 의사소통 기술을 향상시킨다. 이렇게 자신의 경험이나 지혜가 공동의 목표에 도움이 되는 경험으로 사회적 존재감을 얻는다. 삶을 지속하는 동력이다.
문제는 소통이야
생활예술이 만능은 아니다. 생활예술 활동을 한다고 모든 공동체가 자동으로 이렇게 되지는 않는다. 동아리 내 구성원들이 갖는 소속감과 결속력을 위해 지나치게 동일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타 집단보다 우월하다는 명분으로 세력을 키우고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노력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율성을 파괴한다. 이 경우 개인의 자아는 사라지고 집단의 정체성이 자신을 대변한다. 타자와의 공감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버리지 않는 경제적 동물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것이다.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엘리너 오스트롬은 [공유지의 비극을 넘어]에서 공동체가 자신들에게 필요한 공유지를 자율적 협력으로 지키고 유지하는 방법을 밝혔다. 1968년 게릭 하딘이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으로 결국 공유지는 비극을 피할 수 없다’고 온 세상을 설득시킨 지 40년 만이다. 오스트롬은 하딘의 오류를 찾았다. 공유지의 비극은 인간 본성 때문이 아니라 특별히 통제된 조건에서 일어나는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공유지가 필요한 이용자들이 앞으로 닥칠 문제에 대해서 만나 논의하고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는다는 조건이다. 그렇다면 이 두 이론은 모두 참이다. 즉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면, 흙 속 박테리아가 죽으면 공동체도 숲도 유지할 수 없다.
나가며
‘생활예술’을 통한 공동체 활동은 수평적인 소통과 자율적인 협동에 의해 개인 역량을 키워 민주주의를 이루는 중요한 도구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예술과 민주주의의 관계에서 민주주의는 demo(민중)+cracy(통치)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즉, 지금의 의회 민주주의나 대의 민주주의 형식과 같이 능력자들에 의한 위임, 대리 통치와 달리 ‘자격 없는 자들의 통치’³라고 한 것이다. 자격 없는 자, 몫 없는 자가 말과 행동을 할 수 있고 함께 한 실천으로 성공을 경험하는 것은 희망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한다. 이렇게 민주주의는 관계를 통한 감성적 활동으로 촉진된다.
‘생활예술’은 감성적 실천 영역에서 자유롭고 해방된 주체로 변화하는 새로운 개인들이 예술에 부여한 ‘새로운 이름’이다.
1) 지난 10년간 OECD 국가들의 평균 청소년 자살률은 15.6%나 줄었다. 반면 우리 청소년만 보아도 자살률이 무려 47%나 늘었다. 심지어 최근 5년 동안의 대한민국 자살 사망자 수는 전 세계 주요 전쟁 국의 사망자 수보다 2~5배 높다.(이코노믹리뷰. 2016.6.10)
2) 최정규, [이타적 인간의 출현],뿌리와이파리, 2004. p191. 아무런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공유자원을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채취량을 선택하는 실험. 각자 이기적으로 많이 채취하면 모든 사람이 피해를 보지만 모두 이타적 선택을 하면 전체에게 돌아가는 채취량은 높이진다는 조건의 실험.
3) 심보선. 『그을린 예술』.민음사.2013
| 임승관 대표는 2005년 회원 중심 시민문화운동으로 시작한 시민문화공동체 문화바람 운영 경험으로 다양한 생활문화공동체 사업과 컨설팅을 하고있다. 경희사이버대와 대학원에서 생활예술론을 강의하며 공저로 [생활예술]2017. 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