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사물을 재구성하여 미래를 엿보다 - 이호동 작가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날짜 2020-10-06 조회수 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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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사물을 재구성하여 미래를 엿보다

 

이호동 작가

 

인간은 결국 스스로 만든 괴물과 마주하게 되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결국 함께 살아가야 할 생명체, 지구(자연)를 괴물로 만들고 말았다.
자연과 동고동락한 인간은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자연으로부터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과 동일한 생명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산업사회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도시 생활에 열광했고 지구에 생체기를 내기 시작했다. 황금(돈)과 소비에 대한 숭배는 ‘계획된 진부화’(제품의 수명을 제한하기 위해 제품 설계 단계에서부터 의도적으로 제품에 결함을 삽입하거나 내구성을 조절하는 방식)로 소비를 더욱 촉진시켰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무분별한 소비문화는 지구에 대한 배려를 상실한 채 질주했다. 그 동안 이상징후들이 나타나면서 지구의 병통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늘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무심코 자본주의 소비패턴을 즐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2020년 대유행인 코로나 19 앞에선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마침내 뿔이 난 지구를 보며 새삼스레 지구도 소모품이 아니라 생명체라는 것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주가 음양(陰陽)의 질서에 따라 순환하는 것처럼 코로나 19 역시 장단점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수많은 공장이 휴업을 하고, 사람들의 이동을 제한함으로써 경기는 악화되고 자유를 억압당하기는 했지만 공기는 보다 청정해지고 하늘은 맑고 푸르러졌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진 만큼 스트레스는 증가했어도 한편으론 불필요한 만남이나 관계들이 정리됐다. 그리하여 시간의 여유도 생기고 삶은 단순해졌다. 일상의 멈춤과 관계의 단절, 노동의 쉼이 경제적 고통을 가중시킨 건 사실이나 반대로 시원(자연)으로의 회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하게 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삶과 예술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없을까?

  

  우리는 쓰다 버리는 도구처럼 사물을 소비하는 삶에 익숙해진 나머지 인간관계마저 도구로 인식해 버리곤 한다. 매점 직원이나 학교의 청소부, 자기를 가르치는 선생님마저 함부로 대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돈으로 대가를 치른 만큼 서비스만 받으면 그만이라는 태도가 우리의 삶을 황폐하게 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의 삶에 예술이 깃들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면 ‘예술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묻고 또 물었다. 그 후 지금까지의 예술교육 실천 과정에서 필자의 확신은 ‘삶 = 예술 = 놀이’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놀이는 거래나 교환관계가 아니다. 그런 태도로는 놀이에 몰입할 수가 없다. 상대를 인정할 때만 놀이는 이루어진다. 예술이, 우리 삶이 그런 놀이가 될 수는 없을까? 한때는 예술이 삶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삶도 예술도 놀이처럼 즐거워야 한다. 그래서 삶과 예술이 놀이와 구분되지 않는 즐거운 상태이기를 바랐다. 

 

 

▲ 2018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어린이ᆞ가족문화축제 HOW FUN4 굴링체험

 

 삶과 예술이 하나가 되기 위한 한 가지 실천은 낯선 만남이다. 과거 개인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일상의 공간들(전통시장, 학교, 청소년 센터 등)에 스며들어 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버려진 사물들을 결합해 놀잇감을 만들고 그 놀잇감을 통해 아이와 어른이 만나는 낯선 만남을 시도하고 있다. 유용했던 물건을 폐기 처분해야 할 때 그 물건에 애정을 갖고 다시 바라보기를 여러 번. 예술의 재구성은 물체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해 상상과 놀이의 결합으로 생명을 담게 되었다. 그런 행동하는 예술가가 물건과 놀이를 접목하여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내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 회복에도 물꼬를 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약한 예술가로서의 작은 실천들을 이어가다, ‘12씨’ 프로젝트와 ‘굴링픽’(굴링+올림픽)을 하면서 적극적인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12씨 프로젝트는 예술가와 마을의 지혜 있는 전문가가 만나서 12개의 사물로 12개의 놀잇감을 만들어 12명의 청소년을 발굴하는 프로젝트이다.

 

 

미래를 엿보다 – 미약한 예술가의 작은 실천들

 

  12씨 프로젝트의 몇 가지 사례를 보자. 병뚜껑을 팽이로 만들고 전 세계 팽이를 수집하는 분을 모셔서 아이들과 함께 다양한 팽이를 체험해보는 ‘놈팽이’ 놀이. 건축전문가를 모시고 건축에 쓰이는 비계를 이용하여 테이블 축구 게임 형태로 실제 축구장을 만들어 직접 사람들이 좌우로만 다니면서 하는 ‘다함께 차차차’. 폐타이어에 바퀴를 달아 동계올림픽 컬링처럼 놀 수 있게 만들고, 폐타이어를 소재로 그림책 작업을 하시는 분과 아이들을 연결하고, 타이어 모양처럼 둥근 도넛을 케냐 요리사분과 함께 요리해보는 ‘굴링’ 놀이. 새총 전문가와 함께 긴 고무밴드를 이용하여 일상의 모든 가로등, 나무, 철봉 등이 새총이 되게 하고 밀가루 반죽을 당겨서 만든 수제비 요리를 만들고 먹었던 ‘땡기요’ 놀이. 기존에 있던 신발 던지기 놀이를 과거 땅따먹기 놀이와 결합하여 마을의 전통놀이 전문가를 모시고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함께 했던 ‘신과 함께’ 놀이. 달걀판과 탁구공을 이용한 오목 놀이를 보드게임 전문가와 함께 하면서 계란말이 김밥을 만들어 먹었던 ‘꼬끼~오목’ 놀이. 일회용 옷걸이로 놀 수 있는 5가지의 놀이를 만들고 부메랑 전문가와 함께 옷걸이를 부메랑으로 만들어 운동장에서 날려보았던 ‘오메랑’ 놀이 등이 있다.

 

 

▲ 굴링날, 굴링픽

  굴링픽은 ‘다함께 놀아야 산다’와 ‘다함께 지구를 살리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폐타이어를 청소년의 놀잇감으로 업사이클해 올림픽처럼 치른 것이다. ‘학교로 굴러간 굴링’ 프로그램을 통하여 굴링 워크숍, 놀이체험을 진행하였다. 굴링(폐타이어에 바퀴를 달아 만든 놀이감)은 각 학교 학생들이 직접 만들다 보니 개성이 뚜렷하여 각각의 꽃을 피웠다. 모든 스포츠 활동의 기본이 되는 육상종목인 ‘뛰어라 굴링’과 ‘날아라 굴링’을 시작으로 팀원 간 협동심이 중요한 기차 끌기, 줄다리기, 밀어내기, 신체 상호조정능력을 활용하는 굴링볼링, 굴링컬링, 미션굴링 등으로 재미있게 놀았다.

 

  필자가 생각하는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실천적 행위들이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 필자는 예술작품이 작가 혼자의 완성품이 아닌 협업자와 참여자, 관객이 함께 완성해나가는 공동의 수행과정이라 생각한다. 제작방식과 제작결과 모두 새로운 공간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그 공간에서 관객이 작품의 형성과정에 참여하는 위치로 바뀜으로써, 분리되고 소외되었던 관객이 자신의 주체 의지와 역량만큼의 능동적 참여자와 해석자로 변화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런 재구성을 통해 생기가 죽어있는 물건을 예술 작품으로 다시 살리고 사람을 만나게 하는 어울림을 통해 공간을 살려내는 것이다.
 


놀아야 산다.

 


 

▲세상의 모든 오브제로 놀다

 

  니체는 “삶을 즐기려면 아이처럼 살라”고 한다. 아이는 어른과 달리 끊임없이 놀이를 찾고 놀이에 빠져든다. 우리가 삶을 재미있는 놀이처럼 살면 ‘지금 이 삶을 왜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보면 일상의 많은 것들이 즐거운 놀이 대상이 될 수 있다. 실용성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이 버려졌을 때, 그 사물들을  놀이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세상의 모든 사물은 놀잇감이 될 수 있다. 예술가는 이 시대를 읽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한 걸음 더 성찰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시장에서 산 물건이 잘 쓰일 때는 전혀 눈에 띄지 않다가 그 도구성을 잃어버릴 때 눈에 띈다는 것을 하이데거는 빈센트의 구두로 잘 설명한 바 있다. 우리는 그런 낯선 만남으로 존재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탈도구화를 통해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연을 범주화, 획일화, 도구화하는 경계를 넘는 것이 작가에게는 놀이이다. 12씨는 놀이의 시각으로 사물을 재창조하고, 평소 만날 수 없었던 어른들의 지혜가 놀이 속에서 아이들에게 전달돼 12개의 씨앗을 탄생시키는 작업이었다.

  왜 어른은 호기심을 잃게 되는 걸까? 학습을 통해 세상의 많은 것들을 구분하고 범주화하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르다. 아이들은 아직 어른들의 구분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어른들처럼 고정관념이 없다. 그 덕분에 개체의 독특함과 신기함에 주목할 수 있다. 아이들의 사고(思考)는 어른보다 훨씬 더 유연할 수밖에 없다. 일상을 재조합하고 재창조할 수 있다. 일상이 놀이가 되고 아이는 그 놀이에 빠져든다. 그런데 어른인 우리가 아이의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필자는 언러닝(unlearning:과거에 배운 것을 잊어버린다)이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천력이 뒷받침되어야 삶의 주인이 되어 주체성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길은 묻는 자에게 열린다고 하지 않던가. 스스로 문답하는 과정을 기꺼이 감수하련다. 나아가 정해진 나침반 바늘을 수정하는 한이 있더라도 순간순간 갈 길을 선택한 후에는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련다. 언제나 그렇듯 미래는 불확실성의 연속이지만 안정이란 집에서 이만, 휴식을 마치려고 한다. 다음 여정을 위해 길을 재촉해야겠다.
               

 

 

 

  

글쓴이 이호동는 광산구 청소년 문화의집 야호센터 상주 작가로 활동 중이다. 어른들의 삶과 아이들의 삶이 만날 수 있도록 일상에 버려진 사물들을 놀이적 시각으로 재창조하여 이 시대를 담아내는 12개의 업사이클 놀이를 연구하고 있다. 드로잉을 즐기며 문화예술기획 및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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