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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들거리는 창의력, 위험한 놀이와 상상력
김월식(다사리 문화 기획학교 교장)
창의력과 상상력에 대한 이해와 오해
흔하게 예술가들은 상상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다. 과연 그럴까? 나는 10대 때 그림그리기를 시작했고 미술대학을 다녔으며, 작가생활을 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예술대학에서 이런 저런 예술을 지도했다. 사실 중 고등학교 이 후에는 친구들도 잘 만나지 않고 지내는데, 그 이유는 친구들을 만나도 직장이야기, 가정에서 애 키우고 집을 늘려나가는 이야기, 취미로 한다는 골프 이야기 등에서 어떤 대화의 공통분모를 찾기 어려워서 결국 자연스럽게 동창들과의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게 되었고, 어느새 주위에는 그저 자신의 작업에 열정을 갖고 작업에 매진하는 예술가들만이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나는 내 주위의 예술가들에게서 상상력을 발견하고 그 상상력에 감탄한 기억을 별로 갖고 있지 않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특히 시각예술가) 자신의 작업실 밖을 나가지 않고, 면벽하거나 자신의 예술적 기능을 연마하고, 예술보다 더 잉여롭고 사사로운 취미생활에 집중했는데 나는 이런 예술가들의 행위에서 또 그들의 작품에서 상상력과 창의력 같은 놀라움을 발견하는 대신 사회와 단절하고 자신만의 공간에서 지극하게 편협한 자신의 삶을 지속적으로 영위하는 방법의 한편으로 택한 예술가적 삶(이 예술가적 삶은 대체로 쓸모없는 소일거리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런 삶의 태도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창의력과 상상력을 만들어 내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과정이 된다)이라는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 같은 감정들을 주로 받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내게 ‘예술가들은 상상력이 뛰어나다’라는 평들은 매우 인정하기 어려운 사실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사람들은 상상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혹은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에 예술을, 예술적 소양을 배우고 익힌다. 이 즈음에서 탄생한 것이 ‘문화예술교육’이라는 신상품인데 사람들은 ‘문화예술교육’을 통해서 창의적이고 뛰어난 상상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바라며, 특히 자신의 아이들에게 동시대와 미래적 인물상에 부합되는 상상력과 창의성을 탑재시키고 싶은 부모들의 욕망에 힘입어 ‘문화예술교육’은 창의성과 상상력을 성장시킬 수 있는 중요한 성장의례가 되고 만다. 하지만 내 주변의 예술가들에게 예술적 상상력과 창의성을 자주 발견하지 못하듯이 지난 10여년 간 지켜본 수많은 ‘문화예술교육’중에서 창의성과 상상력을 발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이 문제 였을까? 결국 이러한 질문은 ‘문화예술교육’이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 또 ‘문화예술교육’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과연 ‘문화예술교육’에서 상상력과 창의성이 중요한가? 그 상상력과 창의성이 예술적 체험과 어떤 연관관계를 갖는가?
모르겠다. 내 주위의 예술가들의 작업과정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창의성과 상상력을 나는 오히려 그들의 잉여럽고 사사로운 취미생활에서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사실을 고백 하는데, 결국 이러한 이유는 그들에게 사회와 다소 거리를 두고 스스로 단절된 체로 작가적인 삶을 지속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선택된 삶의 행위와 실천, 소일거리와 시간보내기의 소중함과 중요함을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들은 가끔 자신의 작업과 상관없이 손을 조물락 거리며 쓸모없거나 쓸데없는 것들을 만들어 내며 좋아하는데 이 쓸모없음이 결코 쓸모 없는게 아니라는 판단은 동시대 자본이 독점하는 기술과 소비가치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다. 이 견고한 시스탬을 거슬러 오르는 행위로서의 쓸모없음에서 삶을 지탱하는 견고한 창의력을 발견한다면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 결국 이 잉여의 쓸모없는 사사로움에서 나오는 불확정적이고 불가해한 행위들이 편협한 작가관을 지속적으로 흔들면서, 자신의 삶의 실천적 미학을 작업에 반영하게 되는데 그 결과물을 우리는 작품이라고 부른다. 딱히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잉여력과 그 잉여력으로 무장한 소일의 가치가 숨겨진 작품에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작가들의 삶을 지탱하는 편협한 태도들이 모여 예술계라는 다소 황당한 다양성의 카테고리를 만든다. 결국 예술가는 편협하고, 그 편협한 예술가들이 다수 모여 있는 예술계가 결국 다양성으로 읽히기 때문에 매우 상상력이 뛰어나고 창의적인 것 같이 비추어지는 것이다. 이렇듯 창의성과 상상력은 무리속에서 관계속에서 차이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불친절은 창의력의 다른 말
작가 I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꺼낸다. 작가 I는 물론 내가 판단하기에 매우 좋은 작가이다. 여기서 좋은 작가의 판단은 순전히 내 직관적 판단이지만 나는 그가 세상을 바라보고 그의 방식으로 실천하는 삶의 태도적인 증거가 그의 작업이 아닌가? 하는 나름의 판단을 갖고 있는데 자신과 닮아 있는 작업을 하는 그가 좋은 것은 당연하다. 우선 그는 서두르는 것이 별로 없다. 흔하게 하는 예의상 친절도 별로 없다. 결국 그는 그의 방식대로 사람을 대면 대면 만나고 그의 속도대로 자신의 삶을 살면서 작업을 한다. 때문에 별로 타인에게 아쉬울 것도 없고 친절할 이유가 없으며 그것은 그가 지도하는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방식과 속도대로 삶을 살아가는 만큼의 교육적인 철학을 실천하고 있으니, 아이들은 그의 수업에서 일반적인 친절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놀라운 것은 그의 수업에서는 참여자의 자기 주도성이 커진다. 참여자간 협력관계도 중요하게 인식된다. 선생이 갖고 있는 친절과의 거리감이 참여자들 간의 관계적 거리감을 밀착시킨다. 그리고 다소 위험하고 실수적 경우의 수가 여기저기 존재한다. 시각에 의지해 관찰하고 사유하는데 익숙했던 참여자들은 처음으로 관찰이 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서툴게 작동되는 이 시각외적인 관찰은 더디기 때문에 집중을 가져오고 놀라운 인식의 체계를 참여자에게 선사한다. 또한 넘어지면서 서는 법을 배웠던 유아기의 감각을 호출한다. 실수를 반복하면서 익히게 되는 몸의 감각들을 기억해 내면서 성장과 실수에 대한 함수적 관계성을 배우고, 이를 참여자들의 각각의 삶속에서 작동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교육적 의미들이 숨어 있는 작가 I의 수업을 결과적으로 판단하기에는 왜 ‘문화예술교육’이 되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그 흔한 그림그리기와 노래하기, 연극 대사 외우기나 춤추기가 하나도 포함되지 않는 이 프로그램은 보기에 따라서 매우 쓸모없는 프로그램이거나 교육적이지 않고 오히려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 수업 같아 보인다. 더더욱 이런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프로그램에 대한 친절하지 않은 대응과 설명은 오해(?)와 프로그램에 대한 저평가를 가져오기도 한다. 하지면 문화예술교육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갖고 있는 사람이면 작가 I의 수업에 숨어 있는 창의성을 위한 설계를 읽고 함께 감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참여자의 삶에 작동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위한 불친절은 창의력의 다른 말이다. 작가 I는 자신의 소일거리에 이런저런 취미생활을 하는데 그 과정과 결과가 매우 감동적이다. 얼마 전 우연하게 만난 I는 작은 알콜 버너를 다수 만들고 그 버너가 작동되는 것은 내게 보여 주었는데, 그 화력을 만들어내는 기술력에 놀라고 그 버너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작은 커피 캔을 반으로 잘라 만든 버너의 미학적 밀도는 작가 I의 예술적 견고함과 닮아 있었다. 아마도 작가 I는 커피캔을 자르고 작은 방화용 접착제로 알루미늄을 붙여나가면서 이 사사로운 공작적 태도가 가져올 창의적 후폭풍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건들거리는 창의력
개인적으로 최근 문화예술교육에서 가장 인상적인 단체를 뽑는다면 경기 서남부의 한 비보잉 댄스 그룹이다. 이 단체의 수업은 중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이 프로그램은 전형적인 춤교육 이다. 몇 해 동안모니터링을 하면서 전형적인 장르 교육에 대한 불신이 쌓여 있었던 만큼 춤을 매개로한 프로그램에 대한 편견을 갖고 이 단체를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이 일반적 장르교육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금방 인지할 수 있었는데, 그 생각의 끝에 ‘건들거리는 참여자들의 몸 동작’이 걸려있었다. 3시간을 하염없이 건들거리게 하는 장치는 과연 무엇일까? 이 프로그램 속에는 자신의 몸을 사용하는 공간과 타인의 몸이 활용되는 공간사이에 공유지가 있고, 그 공유지에서 관계에 대한 텐션이 조절된다. 배려가 없다면 부디 칠 수밖에 없는 전선 같은 공유지를 10대 특유의 친화지로 만들고 있다. 모르는 이들끼리 등을 맞대고 기립하는 이 황당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타자의 몸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신뢰해야 가능한 부분이다. 일어서다 넘어져도 바로 웃을 수 있다는 지점까지 흥미로운 것은 이 춤의 사회가 얼마나 즐거운지를 증명하는 부분, 비보잉은 결코 관절을 꺽어 신체를 괴롭히며 타자의 춤을 디스하는 제스츄어가 아닌 듯 보인다, 이 예의 있고 즐거운 춤을 어찌 아니 출 수 있을 것인가? 풍경을 리듬으로 쪼개어 몸에 담는 경험, 춤은 시간을 몸에 축적시키는 이상한 기록장치이다. 말하자면 이 ‘건들거림’은 바로 무리속에서 관계속에서 차이속에서 창의적인 몸짓을 만들기 위한 신호이다. 이 신호는 개인에게는 타자의 몸에 말을 건네는 대화의 의지미면서 타자에게는 관계의 몸짓을 위해 읽혀지는 신호가 된다. 이 텐션은 타자의 몸짓을 배려하는 예의의 긴장감이고, 다음 동작을 호출하며 창의적 시그널이기도 하다.
"누군가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는 것은 그를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² 하나의 문화는 역사적으로 전승되고 축적된 다양한 춤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일정한 춤을 추게 하는 것은 '전승된 몸'을 개별적인 몸 안에 각인해 넣음으로써 그 몸을 지배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다양한 문화적인 몸들을 전수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전수된 '몸의 형식'에 맞춰 우리의 몸을 변형시킨다. 춤은 사회가 개인의 몸을 소유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그러므로 같은 춤을 춘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몸은 서로 닮아간다. 춤은 그렇게 '몸에서 몸으로 이루어지는 침묵하는 실천적 커뮤니케이션'이다. 문화적인 몸을 개인적인 몸에 이식하는 춤은 '몸의 역사'를 구성하는 하나의 장르이다. 마스셀모스의 몸의 테크닉 중
마르셀 모스의 말대로라면 신체는 다양한 문화적인 몸들을 전수 받는다. 이 문화적 몸은 결국 몸에서 몸으로 이루어지는 침묵하는 실천적 커뮤니케이션인데 이 침묵 안에 창의력과 상상력이 존재한다. 대체로 건들거리는 행위로 대신 되는 침묵은 내제되어 있는 개별적 몸과 동시대 몸동작의 DNA와 연동되면서 타자에게 말을 건네고 회답을 받으며 서로를, 관계를, 공동체를 이해하고 배려를 배우는 통로가 된다.
위험한 놀이와 상상력
위험한 놀이와 창의력의 관계를 작가 I의 사례를 통해 조금 이야기 했다면 연극 치료 ‘S 연극치료 연구소’의 프로그램 안에서의 위험한 놀이와 상상력의 관계에 대하여 조금 더 이야기 해야 할 듯 하다. ‘S 연극 치료 연구소’의 놀이에는 연극적 장치가 포함되지만 연극이라기 보다는 무리속에서 관계를 읽고 사유하고 놀이하기라는 세심한 교육적 전략들이 숨어 있다. 초등 저학년 참여자들 사이의 부끄러움과 서먹함, 불편한 자신감,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모두 존재하는 프로그램으로 타자를 향한 관심의 개별성들과 접근적 태도들이 소통의지와 표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배움으로 확장된다. 프로그램 속에서 아이들은 놀이 소재로 주어지는 에어캡의 소리에 반응한다. 에어캡과 몸의 접점은 소리를 만들고, 비로소 몸의 움직임을 감각적으로 확인하는 순간 흥과 에너지로 전환되는 신호가 된다. 이 신호는 곧 아이들과의 에어켑 쟁탈전을 가져온다. 에어켑을 서로 당기면서 타자의 신체에 전달되는 힘의 텐션을 감각적으로 익히면서 위험을 직감하고 조절하기 시작한다. 일상에서의 금기된 행동을 일부분 허용하는 몸 교육은, 감성을 활성화시켜 개별적 욕망을 예술적 가능성으로의 통로를 만들고 있다.(심한 몸싸움 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몸의 기운들이 충돌하고 함께하고, 포기하다가 자체가 놀이가 되는 난장이 된다.) 아마도 아이들을 이 프로그램 속에서 자칫 위험해 보일 수 있지만, 개인의 표현 욕구와 수행을 최대한 발현할 수 있는 삶의 유일한 장소이자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에 서 프로그램을 더욱 즐겁게 하는 지점은 최대한 산만하게, 최대한 큰 소리로, 초등 저학년의 집중력을 지속적으로 이끌어내는 강사들의 자연스러운 티칭 테크닉이다. 산만함과 참여주체적 자율성의 알고리즘이 상상력을 배양한다. 이 위험한 놀이’는 어떻게 창의력과 자신감, 배려심을 만들고 있나? 몸싸움에 가까운 타자와의 심한 몸의 텐션과 힘의 역학을 자연스럽게 조절하는 이 놀이는 문명에 소외된 암묵지의 야생성들을 호명한다. 아마 최초의 인류사회가 이러했을 듯, 감각적으로 질서를 만들어가고 그 질서 안에서 개인의 존재를 몸의 개별적 표현으로 인지한다. 이성적 위계의 등위로는 절대로 습득할 수 없는 동등한 몸의 관계들을 배우는 과정이다. 결국 창의력과 상상력은 가끔은 이렇듯 위험한 놀이 속에서 타인과 나를 발견하면서 그 관계를 지켜내는 의지로 작동되며 만들어 진다. 때문에 이 위험한 놀이는 상상력의 촉매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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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식은 고도의 압축 성장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산업화 과정을 함께한 커뮤니티의 전체주의적 목적성을 경계하며, 발전과 성장의 동력이자 조력자로써의 개인의 가치에 주목하는 작업을 해왔다. 2010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에서는 예술보다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삶에서 발생되는 의미들을 존중하며 이를 공유하고 나누는 프로젝트인 ‘무늬만커뮤니티'를 진행하였고 그 외 2011생활문화재생레지던시 ’인계시장프로젝트’, 2012중증 장애인과의 협업극 ‘총체적난 극’, 2014동시대 아시아 예술가들의 커뮤니티에 대한 연구’cafe in asia’와 2016시흥시의 ‘모두를 위한 대안적 질문 A3레지던시’를 기획하였다. 2018년 미디어 아트 비엔날레외 다수의 국내외 전시에 참여 하였다, 현재 다사리 문화 기획학교의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