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구름편지]이런 거 해서 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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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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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을 계획하기 - ④

이런 거 해서 뭐해?


민병은 / 지혜로운 봄 대표


“계획을 위한 계획”이란 주제로 한 달에 한 번씩 네 편의 글을 썼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글을 맺는다. 문화예술교육과 관련된 현장에서 활동하는 기획자들에게 다정한 글이 되고 싶었는데, 잔소리로만 끝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우려가 앞선다. 문화예술교육과 관련된, 더 직접 말하면 지원사업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고자 해서 좁은 관점으로 기획을 말했기에 한계가 있었다. 한 나무에 달린 나뭇잎조차 모두 다르다는데, 각 현장이야 말할 것도 없이 복잡한 상황일 것이다. 그래서 내 경험을 근거로 전달하는 이야기가 정말 다정하게 들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다정하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하는 질문도 생겼다. 아무튼, 마음을 다해 다정하게^^ 남은 이야기를 해보겠다.


《뜬구름 편지》기획연재 #계획을 계획하기 ①②③④


냉소가 스미지 않게

문화공간을 운영한 지 삼 년 정도 됐을 때였나.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아리송해서 곤란할 때가 있었다. 갑자기 ‘이런 거 해서 뭐 할까’ 하는 공허함이 들기 시작했다. 외부 사업비를 가져와서 주민들을 ‘위해’ 나름 ‘노오력’ 했던 시절, 참여자들의 태도가 무례할 때 그랬다. 빈약한 근거를 들어 제기된 민원에 대해 행정 쪽에선 우리에게 무작정 바로잡으라고만 하니 맥 빠지곤 했다. 일부 주민들로부터 “내가 낸 세금인데…….” 운운하는 소리를 들으면 참 기분 거시기해졌다. 제공과 대가가 명확하지 않은, 시민 모두를 환영하는 무료 문화예술 활동을 하다 보면 불특정 다수와 부대끼면서 황당과 당황이 오락가락한다. ‘해서 뭐 할까. 이게 무슨 의미일까. 나는 뭐 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종종 떠올랐던 것 같다. 맘 한편에서는 ‘나 아니면 누가 하겠냐’와 같은 뻐기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자괴감은 더 클 수밖에.

‘하면 뭐 해. 다 그런 거야. 기대하지 말자.’라는 냉소가 스며들 때 나를 건져 올린 가치는 ‘공공’이었다. 공공활동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되면서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좀 더 명확해졌다. “시종 대민 서비스 중”이 아님을 명확히 인지할 수 있었다. 덕분에, 세금을 내는 시민들에게 감히 “NO”라고 눈치 안 보고 말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고 나면 거리를 둘 수 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으므로 그럴 수 있다는 마음도 생겼다. 중요한 것은 내게 재밌을 것 같은 일을 기획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고 필요하다고 침 튀기며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재미있게! 냉소의 반대는 유머라고 하지 않던가.


혼자 하지 말기를

나를 달래는 방법 중 하나가 모닝 페이지 쓰기다. 일하기 싫고 아침이 힘들어 무기력해질 때 스스로 부스팅 하는 방법이다. 어디선가 읽었던 대목을 베껴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지표 같은 문장이다. 여기에 소개해 보겠다.

계절의 변화를 아는가?
나는 여기에 있는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가?
위안이 되는 일을 하는가?
좋은 음식을 먹는가?
내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과 만나는가?
콧노래를 부르는가?


일하기 싫고 아침이 힘들어 무기력해질 때 스스로 부스팅 하는 방법은 모닝 페이지 쓰기다


“행복하니?”라는 왠지 거창한 답이 있을 것 같은 말보다 이런 질문들을 받으니 한참 생각할 수 있었다. 혼자 끙끙거리며 내 생각을 고집하지 말자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핵심은 지금을 살라는 말로 이해되었다. 나 아니면 안 되는 것은 없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관계’로 구성되는 수많은 나를 언급했다. 그리고 최소 단위로서 개인은, 종교에서는 구원의 대상으로 경제·사회에선 통치할 대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의 정체성은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나는 전경도 배경도 될 수 있다. “쟤(나)는 저(이)런 사람이에요”에서 벗어나길.

기획자는 사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책임을 져야 하므로 힘들다. 기획하기 그 자체는 흥미로운 일이지만 막상 사업이 진행되면 규모와 상관없이 긴장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매사 힘이 들어가곤 한다. 왜 안 그렇겠는가. 사람을 대하는 일은 편하지 않다. 나 같은 소심형은 더 그렇다. 실행을 위한 사업이든 정책 제안이든 기획에는 대상이 있다. 방대한 작업이든 그렇지 않든 그 작업 자체를 수행하기 위해선 한계를 파악해야 한다. 이 한계를 전제하고 적합한 개념 혹은 정의(working definition, 定意)를 설정해야 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연결되고 확장되고 소멸한다.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다. 어렵고 힘든 일을 감당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콧노래 부르면서 좋은 음식을 먹으며 할 만한 일로 만드는 것도 기획자의 역량이다. 재미가 있어야 의미도 있다.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때 내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과 만나라. 그림에서 전경과 배경은 서로의 깊이를 만들어주는 것처럼 서로의 깊이가 되는 동료가 되어주기를.



콧노래를 부르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할 만한 일로 만드는 것도 기획자의 역량이다


기획하지 않는 기획, 뜻하지 않는 기획

이반 일리히는 ‘기획(planning)’이라는 낱말이 2차 대전 이후 만든 사전에 처음 실렸다고 했다. 사람이나 환경을 의도에 맞게 바꾸겠다는 자체가 인간의 ‘오만함’이라고. ‘의무교육, 00 발전계획’처럼 기획과 관련된 말은 자주 제도와 같이 따라다닌다. 의도적으로 환경을 조성하는 제도는 부작용이 따른다. 기획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이미 인간 중심의 세상을 살아온 인류세 인간에게 기획은 작든 크든 일을 앞두고 붙는 흔한 말이 되었다. 다만 기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혹은 기획한 대로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났으면 해서 하는 말이다.

효율과 효과를 따지다 보면 느림과 실패를 곱게 볼 수 없다. 그러나 빠르기만 하면 빠른지 모른다. 잘하기만 하면 잘하는 줄도 모를뿐더러 샛길을 수용할 수 없다. 사람과 부대끼는 문화 활동이 생각과 계획대로 된다면 그것만큼 이상한 게 있을까. 내가 자주 쓰는 표현을 해보자면, 물이 흐르다가 돌멩이를 만나면 물이 그것을 타고 넘거나 멈춰서 물이 더 고이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돌멩이 크기에 따라서 물의 속도가 더뎌질 수도 있다. 웅덩이를 만나면 머물러 물이 찰 때를 기다려 물의 힘으로 흘러간다. 그 방향은 타고 넘기 낮은 곳이 될 것이다.

기획 의도대로 세부 내용을 구성한다 해도 실상은 가설일 뿐이다. 사람 혹은 공간이나 시간 등 사람 아닌 존재로 인해 다양하게 흔들린다. 오히려 흔들리면서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지도 않게 케미가 발생한다. 이 화학작용, 이질적인 어떤 것이 생기는 순간은 흥미롭다. 기획자로서 느끼는 신나는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계획된 회차마다 해야 할 활동을 따박따박해내기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욕망들이 만나 다른 일이 생겨나는 틈을 들여다보기를. 달싹거리는 가능성을 미리 속단하고 놓치지 말기를. 참여자들을 믿고 힘을 빼보기를. 이때 기획하지 않았던 다른 기획이 얼굴을 내민다. 뜻하지 않은 기획이다.

누군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때, 얼기설기 관계들이 연결되면서 생각지도 않은 현장이 만들어져 갈 때 예기치 않게 기쁨이 찾아온다. 매혹되는 순간이다. 매혹되기는 능동과 수동이 동시에 일어나는, 자발적으로 끌리는 현상이다. 매혹되는 현장과 자주 마주치기를 기원한다.




민병은 / 지혜로운봄 대표

정책사업을 실현하는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문화공간을 운영하며 문화예술이 법, 행정과 무관하지 않음을,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미묘하기까지 한 지역과 끈끈하게 이어져 있음을 배웠다. 

지금은 컨설턴트로, 프로젝트 기획자로, 강사로, 가끔은 연구자의 모습으로 현장을 만나고 있으며 적당히 아름답게 상호의존 할 줄 아는 노년의 삶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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