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_인터뷰_1.jpg [size : 1.6 MB] [다운로드 : 0]
어린이는 없다
임아영 / 뜬구름편지 편집위원
자주 들고 다니는 통통한 빨간 수첩이 있다. 정미정 대표를 만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자마자 가방에서 허겁지겁 그 수첩을 꺼냈다. ‘어디쯤이었더라.’ 한 장 한 장 넘기다 “11.4. 느티나무”라고 적은 페이지에서 딱 멈췄다.
2022년 11월 4일, 우리는 광주 남구 노대동에서 만났다. 문화예술교육 인큐베이팅 단체 ‘느티나무 탐험대’ 대표와 모니터링 담당자로서 마주 앉아 두 시간이 넘도록 신나게 떠들었다. 삼십여 년을 부자연스럽게 살아오다 산과 아이들 덕에 비로소 자연스러워진 그녀의 삶이 남의 것 같지 않았다. 듣는 귀는 코끼리만큼 커졌고, 받아 적는 손은 치타처럼 달렸다. 하지만 보고서에 채택할 수 없는 부지기수의 이야기는 결국 수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로부터 이 년 후에 우리는 다시 만났다. 노대동에 있는 분적산 편백숲 평상 위에 마주 앉은 뒤 안부를 묻기 위해 여러 단어를 떠올리다가 ‘통계’를 골랐다.
올해 '예술시민배움터'에서 "어쩌다 숲속 미술관"을 열고, 동네 어린이들과 분적산을 누비는 '느티나무 탐험대' 정미정 대표를 찾아갔다. ⓒ청춘기획
재작년엔 두 가지 일을 같이하고 있었는데, 통계 쪽에서 아직도 일하고 있나.
여전히 통계 일도 하고 있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통계 연구소에 있다가 퇴직하고 벤처기업으로 옮겼는데 빨리 한꺼번에 일을 처리해야 했고 제때 퇴근하기 어려웠는데 대학원까지 다녔다. 서른 무렵이었는데 갑자기 미국 지사로 가라고 했고 새로운 공부와 영어까지 해야 하니까 너무 힘들었다. 번아웃 증후군이 찾아왔고 회사와 학교를 접었다. 집에서 난리가 났지만 이게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믿었고, 취미였던 바느질을 다시 하려고 염주동에 퀼트 공방을 열어 칠팔 년 정도 했다. 고집해서 통창을 냈는데 그때 처음으로 사계절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창 너머로 벚꽃, 은행잎, 눈송이 날리는 것을 보면서 이런 게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공방을 정리했는데 전에 다녔던 연구소에서 다시 와달라고 해서 다니고 있다.
우연히 생태교육을 했다고 들었다. “처음엔 민들레밖에 몰랐다”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공방을 하면서 서른다섯 살에 결혼했고 아들과 딸을 낳았다. 자식들이 결혼한 뒤 역할을 잃었다고 생각한 친정엄마는 한때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는데, 내내 헌신하며 살아온 엄마 인생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큰애가 알아듣지 못해도 “엄마는 엄마 인생을 살고, 너는 네 인생을 살아야 해.”라고 말하곤 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애가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내가 할 몫이 있다고 생각했다. 학교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안전한 곳인지 학생들은 행복한지 묻고 듣고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서 학부모회 활동을 열심히 했다.
아이들은 진남초등학교에 다녔는데 풀빛근린공원이 가깝다 보니 일 년에 네 번씩 건강 걷기 프로그램을 했다. 그때 엄마들이 안전지도를 했는데 그야말로 걷기만 했다. 그래서 엄마들이 강아지풀로 노는 법처럼 옛날 우리가 놀던 것 가르쳐주고 싶다고 생각했고 학교에서 지원해서 초등학생들에게 생태수업을 할 수 있었다. 민들레밖에 모르던 내게 신세계가 열린 것이다. 마을과 학교의 어른들이 뜻을 모아 공부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귀한 사례라고 상도 받고 교육청에 가서 발표도 했다. 그렇게 ‘느티나무 탐험대’가 생겼다.
육 년째 ‘느티나무 탐험대’로 활동하고 있는데 문화예술교육은 언제 어떻게 시작했나.
재작년에 인큐베이팅 단체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이때부터 다르게 사고할 수 있었다. 숲놀이하면서 미술도 하긴 했지만, 문화예술교육을 하면서 체계를 다시 고민했다. 처음엔 ‘자연물로 표현하면 하는 거고 말면 마는 거지’ 하고 끝났다면, 문화예술교육을 하면서는 어떻게 하면 아이가 마음을 열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서서히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이래서 이 일을 계속하는구나’ 하고 깨달았다. 실은 나는 좋은 부모는 아니다. 이기적인 엄마인데 이 일을 하면서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 까딱하면 옹고집스런 독재자로 살았을 텐데, 문화예술교육을 하면서 아들딸과 속 이야기를 주고받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완전 T(성격 유형 검사 MBTI에서 ‘사고형’을 뜻하고 ‘감정형’과 대응함)인데, 이제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말을 한다. 내가 많이 변했다.
처음엔 아이들이 풀, 나무, 벌레와 친해지기만을 바라다가 문화예술교육을 하면서 그들이 속마음을 드러내도록 돕다 보니 자신도 표현하는 법을 배우며 달라지고 있다고 했다. ⓒ청춘기획
‘너를 변하게 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내가 바뀌었다’는 고백이 놀랍고 반갑다.
어린이를 만나는 마음이 궁금하다.
아이들을 만날 때 그냥 아이 같은 마음이 된다. 올해는 “어쩌다 숲속 미술관”을 하고 있는데, 아이들에게 전시를 보여주고 싶어서 동료들과 미리 광주시립미술관을 답사했다. 거기서 삼 층짜리 미끄럼틀을 봤다. 동료들은 놀라면서 “저기서 못 놀게 해야겠다.”라고 했는데 나는 “무슨 소리야. 놀이터에서 못 놀면 어디서 놀아. 위험한 놀이터가 진짜 놀이터지, 안전하면 재미없잖아. 안전하게 있을 거면 집에 있어야지. 그래서 어린이 보험 넣었잖아.”라고 했다. 아까 유치원 아이들 만나고 왔는데 같이 뛰어다니다가 넘어졌다. 어떻게 안 넘어지고 살 수가 있나, 넘어져야 일어나는 법을 아는데. 애들은 재밌으면 울다가도 툭툭 털고 일어나 또 논다.
‘느티나무 탐험대’는 모두 네 명인데 나는 아이들과 동료들 중간에 존재한다. 애들은 내가 어른 같지 않아서 좋다고 한다. 하지 말라는 소리도 안 하고, 어리거나 어른이라고 봐주는 거 없다고 하고, 이 안에선 모두 동등하다고 하니까 더 쉽게 어울렸나 보다. 그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동료들이 날 봐주고 채워줘서 지금까지 할 수 있었다. 냉철한 꿀벌 김선아, 풀 박사 솔방울 김유리, 정리대왕 클로버 박미라, 그리고 새로 온 대학생 선생님 이수아까지 우린 아주 다르지만 그래서 굴러갈 수 있었다.
걷다가 숲에서 주운 것들로 땅을 종이 삼아 모둠끼리 만다라를 그렸다. 새가 떨어뜨리고 간 깃털이 화룡점정했다. 숲이 내놓은 미술 재료는 다시 땅으로 돌아갔다. ⓒ느티나무탐험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