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뜬구름 편지] 다 이유가 있다
광OO
날짜 2024-05-28


계획을 계획하기 _____ ①


다 이유가 있다 



민병은 (지혜로운봄 대표)



‘뜬구름 편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뜬금없이 웬…….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긴 시간을 보낸 편집위원들의 힘 뺀 결론이어서 좋았던 것 같다. 나중에 웹진에 실린, 뜬구름 편지로 개편한 이유를 찬찬히 여러 번 읽었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일하는 기획자들과 강사들 편에 서서 생각해 보려는 다정함으로 읽혔다. 앞으로 ‘계획서를 계획하기’라는 주어진 주제로 네 번에 걸쳐 글이 나갈 예정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현장 경험, 나름대로 공부했던 내용,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좋은 사례 등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이야기에 근거해 글을 쓴다는 것을 미리 말해둔다. 들어줄 만한 잔소리 혹은 다정한 참견이 되었으면 한다. 명확한 것은 계획서 작성법이 아니라는 점이다. 계획서는 잠시 밀어두자. 



뜬구름 편지로 개편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세상에 나오는 사안들엔 다 이유가 있다. 

지원사업이 나오는 데도 이유가 있다. 하나의 사업이 공모 형식으로 올라오기까지의 배경을 알면 사업이 등장한 이유를 잘 파악할 수 있다. 지원사업 계획서를 쓰고자 마음먹기 전에, 공모 지원 내용을 잘 읽어보고 설명회가 열리면 참석해 잘 들으라고 말하고 싶다. (사업마다 다르겠지만) 중앙이나 광역 혹은 시·군 단위에서 필요한 정책이라는 판단하에 사업은 설계된다. 사업의 목적과 예산 편성은 물론, 현장을 만나고 사업을 운영하는 주체를 설정하는 방법과 성과 측정에 이르는 전체과정을 설계하는 이 과정을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꿈다락 토요문화학교”를 예로 들어보자.

주 5일제 수업을 대비하기 위해 2011년에 시작했고, 다음 해에 주 5일제 수업이 시작되면서  학교문화예술교육 활성화 사업으로, 2013년부터는 사회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이 되었다. 토요문화학교는 어린이·청소년의 여가 문화와 가족 학습문화를 만들고, 세대·계층·가족 공동체가 화합하며, 지역의 다양한 문화예술 전문기관과 단체가 참여하여 콘텐츠를 개발하고 운영함으로써 청소년의 창의·인성교육 기회를 확대하고 문화예술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해 시작했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난 2022년에 토요문화학교는 새롭게 설계되었다. 10년 동안 다양한 내용을 실험하고 제안하면서, ‘토요일에 열리는 청소년 프로그램’이라는 기존 내용과 형식은 조금씩 변했다. 그렇게 토요문화학교는 생애주기별 시민프로그램으로 전환하고 확대하고자 몸을 바꾸고 있다. 


마찬가지로 생애주기별 문화예술교육도 국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보편적 문화예술교육을 지향하면서 전 생애를 구성하는 연령대로 접근해 국민 모두를 커버하려고 시도했다. 유아·신중년·직장인 대상의 사업들은 이러한 이유에서 나온 사업이라 하겠다. 2016년 이후 흥행(?)했던 생활문화사업은 어떤가. 또 예산이 삭감된 지금은 어떤가. 모든 것에는 옳고 그름을 떠난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리가 받아 드는 공모사업 지원서 양식에는 ‘000 계획서’라고 이름이 붙는다. 이미 중앙이나 광역, 시·군에서 기획된 사업이 구체화되어 사업화하는 단계, 즉 계획이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해석했다. 그러나 모든 사업에 지원하는 운영단체는 자기만의 기획을 해야 한다. 단체가 사업을 펼쳐갈 현장에 대해 문제의식이 들어가 있는 기획안이 필요하다. “사업의 목적과 예산 편성은 물론 현장을 만나고 사업을 운영하는 주체를 설정하는 방법과 성과 측정에 이르는 전체과정”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중앙이든 기초 단위든 해야 할 기획의 프로세스는 대동소이하다. 큰 살림이든 작은 살림이든 있을 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여기에 딱이다. (앞으로 더 큰 범주의 개념으로 계획이 아니라 기획이라는 표현을 쓰고자 한다. 계획은 기획안과 관련된 세부적인 사항에 대응해서 쓸 것이다.)  

 

 

지원에 도전하고 싶다면 사업이 생겨난 이유를 알아보고 변화 지점을 찾아보자. 

꿈다락 토요문화학교는 왜 나오게 되었는지. 이제 “꿈다락 문화학교”로 변화된 이유는 무엇인지. 무엇이 달라졌는지.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이유를 알면 사업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기획자 개인 또는 단체(앞으로 기획자로 통칭하겠다)에게 맞는 사업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다.



기획에는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 해야만 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적절히 섞여있어야 바람직하고 그 가운데에 재미가 있어야 한다 ⓒ조수현



기획자 역시 지원사업을 하고자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야마자키 료가 쓴 『커뮤니티 디자인』에서 “기획에는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 ‘해야만 하는 것’ 세 가지 요소가 있다”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면 취미 활동이고, 해야 하는 것만 있다면 의무가 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어야 바람직하며 세 가지 요소가 만나는 공통의 지점에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재미는 나에게도 핵심적인 동기다. 


내 경험으로 볼 때 기획자들이 공모 사업에 지원하는 이유가 ‘할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재능을 살려서 할 수 있거나, 아는 강사랑 같이할 수 있거나, 우리 팀에서 해봤거나 등등. 할 수 있는 것에서 출발하게 되면, 앞에서 말한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등장한 사업의 목적과 멀어진다. ‘할 수 있는 것’을 사업의 목적에 맞추다 보면 추상적인 말이나 관념적인 설명으로 메꿔진다. 기획서를 앞에 두고 스스로 물을 때가 있다. “니가 하는 말을 너는 납득할 수 있니?”



지원사업은 목적 사업이란 점을 잊지 말자. 

‘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하고 싶은가. 끌리는가. 나는 이것을 ‘재미’라고 말한다. 기획자가 재미있게 사업을 풀어간다면 참여자도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일단 막막할 수도 있는데,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해야만 하는 것’이 부담스럽게 다가오더라도 ‘왠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다시 말해. 내가 혹은 우리 단체가 왜 해야 하는지 거칠게라도 설명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좀 미뤄두려고 한다. 왜냐면 도와줄 기획자 친구들이 있으니까.


지원사업이 아니더라도 지역에서 ‘해야만 하는 일’과 종종 대면한다. 처음부터 재미있을 것 같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하다 보니 재밌어지는 때도 많다. 내가 운영했던 문화공간은 기형도 시인 생가와 비교적 가까이 있었다. “이곳이 아니면 어디서 기형도 시인과 관련된 일을 하겠냐”라는 주위의 압박에 힘들었다.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당위와 ‘모르는 분야’라는 걱정이 공존할 때 예상하지 못했던 분들의 도움으로 굽이굽이 넘어갔다. 그리고 이때 만들어진 모임이 성장을 거듭하며 분화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다. 과정은 순전히 그들 힘에 의한 것이었으나 이 또한 나의 자랑 서사 중 하나다. 



지원사업은 절대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공모에 지원하고자 할 때는 나 자신을 설득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돈벌이가 아닌 다른 이유가 필요하다. 나에게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서다.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일 수도 있다, 물론 가끔은 공적인 이유가 달리기도 하지만,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기획자들이 소모되는 일이라면 하지 않길 바란다. 시간과 공을 들인 만큼 얻어가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경험이 남든, 관계가 남든, 감동이 남든, 혹은 운영자들 팀워크가 좋아지든. 현장에서 기획자들과 만날 일이 있을 때 “종이를 하얗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지우고 지우다 없어지고 마는 지우개가 되지 말자”라고 자주 말한다. 뻔히 보이는 어려운 현장 상황에 꺼내기 쉽지 않은 말이지만 그래도 한다. 지역의 문화예술교육은 문화재단이 주체가 아니다. 현장에서 사업을 운영하는 단체들과 정책과 행정을 담당하는 재단과 지자체, 그리고 참여자들이 같이 만들어 간다. 적어도 서로 소비만 하다 끝나진 않았으면 한다. 사업에 이유가 있듯이 재단이나 행정, 운영단체와 기획자 개인마다 이유가 있다. 서로의 존재 이유를 알아 갔으면 좋겠다. 





민병은 / 지혜로운봄 대표

정책사업을 실현하는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문화공간을 운영하며 문화예술이 법, 행정과 무관하지 않음을,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미묘하기까지 한 지역과 끈끈하게 이어져 있음을 배웠다.

지금은 컨설턴트로, 프로젝트 기획자로, 강사로, 가끔은 연구자의 모습으로 현장을 만나고 있으며 적당히 아름답게 상호의존 할 줄 아는 노년의 삶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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