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뜨르릉] 상상 속에서 유영하기
광주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날짜 2025-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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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톺아보기 - ③

상상 속에서 유영하기



최서영 / 그림책 작가



그을린 시간


모든 계절에 항상 무엇인가를 다듬고, 말리는 한 할머니가 있었다. 심지어 폭염주의보 경보가 울리는 날에도 말이다! 그 할머니는 더위가 발악하는 여름의 끝자락에서도 추석을 준비하느라 참 분주하셨다. 아파트 입구 계단에 앉아 엄청난 양의 새빨간 고추를 다듬고 계셨다. 수많은 고추를 뙤약볕에서 쉬지도 않고 하나하나 살피며 가지런히 놓고 계셨다. 그러다 신이 난 얼굴로 전화를 다급하게 받으시더니 온 아파트가 울리도록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먼, 하먼, 오지마라. 절대 올 생각허덜더마러. 니들 돈 잘 벌고, 건강한 것이 질이지(제일이지) 절대 올 생각 마라잉. 니들 오면 밥 챙겨야 하고, 나도 인자 귀찮다. 한나도 (하나도) 안 서운타! 그란디, 나가 째깐히 뭐 헌 것이 있는디. 그것만 째깜 보낼란다.” 


찰진 할머니의 사투리에 ‘역시 대한민국의 어머니는 씩씩해’라며 웃음이 피식 나오려는 찰나였다. 그런데 통화를 마치고 할머니는 온몸에 힘주어 고추들을 가마니에 다시 처넣으셨다. 다물고 있는 입 주변의 주름들이 더 깊게 얼굴을 파고들어 부르르 떨렸다. 팔꿈치로 연신 눈을 비벼대셨다. 할머니는 고추를 주워 담는 내내 어깨를 들썩이셨다. 고추가 매워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할머니를 힐끔 바라보았는데, 지난겨울보다 얼굴이 훨씬 까맣게 타 있었다. 소중한 사람의 한 끼를 위해 일 년을 준비한 그을린 시간이 할머니의 얼굴에 남아있었다. 뙤약볕이 더운지도 모르고 그을렸던 시간이 전화 한 통으로 순식간에 재가 되어버린 것을 목격하니, 얼굴도 모르는 그놈의 바쁜 자식이 미워졌다. 내 코끝이 찡해지는 것은 꼭 모성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할머니처럼 문화예술과 관련된 종사자들은 오랫동안 정성을 들인 빼곡한 시간이 순식간에 헛수고가 되는 일들이 많다. 그 기다림과 허탈함을 알기에 할머니보다 한참 어린 내가 그 서운함을 감히 공감했다.


문화예술교육현장에서 제일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은 비 소식이다. 비가 오면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무관심 속에 몸과 마음을 다해 그을렸던 노력들이 묻혀버린다. 그렇게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 인적이 드물어진 현장은 어쩐지 헛헛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리를 지켜준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곱절로 고맙고 미안해서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지만, 애썼던 노고가 허탈하여 자꾸만 힘이 빠진다. 서둘러 고추를 가마니에 처넣고 집으로 돌아간 할머니처럼, 나도 얼른 자리를 뜨고 혼자 집에서 실컷 울고만 싶어진다. 그래서, 나의 문화예술현장에서 비는 결국 시련이 되어 기어이 짠기 없는 눈물이 된다. 명색이 긍정의 문학인 그림책으로 먹고사는 사람인데, 난 작은 시련에도 쉽게 유약해진다. 어떻게 해야 나는 좀 더 시련 앞에 옅은 미소라도 지으며 담담할 수 있을까?



시련만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굳이백배미(米:쌀미)팀을 통해 도심 속에서 2평 남짓한 구들장 논을 만들어 100명 내외의 참여자들과 함께 절기마다 모여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이 팀의 가장 중요한 행사는 모내기다. 참가자를 모집하여 한 사람당 하나의 모를 심는 농사의 첫 구슬이 꿰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모로 의미 있는 첫 행사에 호우주의보 경보가 울렸다. 역시나 많은 사람이 올 수 없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담담하기는커녕 낙담을 넘어서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난 왜 이렇게 재수 없지!’ 나와는 반대로 오랫동안 도심에서 농사를 지어온 팀원 맑똥은 해맑게 말했다. “일단, 비가 온다고 한께, 걍 우리끼리 모내기 해부러요.” 그러자 나머지 팀원들도 들뜬 목소리로 저마다 아이디어를 말하기 바빴다. 그림책 의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아이처럼. 


“그래, 대신 자기 모를 볼 수 있게 사진 찍어서 보내주자.”

“이름 불러주면서 유튜브로 실시간 라이브 방송하면 더 편할 거야.”

“직접 심지 못해서 아쉬우니까, 모 심은 위치를 좌표로 기록해서 보증서처럼 만들어주자.”

“비 오니까 파전 만들어서 나누어 먹자. 내가 재료 가져올게.”

“그럼 난 막걸리 만들어서 가져올게. 막걸리도 쌀로 만들었으니까 의미도 있어!”


본래 준비했던 행사보다 더 부풀어진 내용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진행되었다. 그렇게 전주한옥마을 한복판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6월의 모내기를 마쳤다.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아쉬운 발걸음을 재촉하던 여행자들은 “이게 웬일이야?” 하며 신을 벗고 질펀한 논에 들어와 모를 심었다. 멀어서 행사를 신청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자신의 모를 심어 주라고 요청하였다. 결국, 예상과는 달리, 기존에 받았던 신청자보다 훨씬 더 많은 신청자의 모를 심을 수 있었다. 그저 비에 젖은 종이에 불과한 모 보증서는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사연 있는 선물이 되었다. 그날도 비는 여전히 시련이었지만, 시련만 있을 리가 없다는 팀원들의 뻔뻔하고도 천진난만한 태도가 참으로 동화 같았다. 흠뻑 비를 맞아도 기분이 좋았던 그 날, 나는 어른이 되어 세상 물정을 얻고, 상상하는 기쁨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상상은 현실을 바꿀 힘이 없다고 은근히 하대했던 것을 인정했다.


흠뻑 비를 맞아도 기분이 좋았던 그 날, 나는 어른이 되어 세상 물정을 얻고, 상상하는 기쁨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상상은 현실을 바꿀 힘이 없다고 은근히 하대했던 것을 인정했다. ⓒ최서영



상상하는 기쁨


어린이들은 일어난 현상, 궁금한 것들, 닥친 어려움을 설명할 충분한 지식이 없으니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그 상상의 힘으로 그림책에서 수많은 주인공이 크고 작은 어려움을 극복한다. 의 여자아이도 마찬가지다. 어린 여자아이는 미래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 언젠가 할머니 잃을 것 같은 상실감, 오늘은 특별한 달걀 요리가 먹고 싶은 욕구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인 엉뚱한 방법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 터무니없는 상상이 실현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어린이는 당당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것만 있을 리가 없잖아”라 외치며 세상에 존재하는 현실적인 방법보다 훨씬 더 많은 선택지를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상상력을 마음껏 펼친 주인공은 마침내 어려움과 문제를 돌파하는 힘이 생겨났다. 그림책 속의 어린 주인공에게 스며든 긍정하는 태도는 서툰 상상에서 시작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세상 물정을 알아가고, 현실과 타협하는 어른의 세계로 입성하면서, 상상하는 기쁨을 잃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상상은 어린이의 전유물이라 여기는 어른이 된 나는 어린이만큼 시련 앞에 많은 선택지를 꺼낼 수 없었다. 그래서, 부지런히 현실과 타협하면서 삶을 즐겁게 유영할 수 없었다. 


『그것만 있을 리가 없잖아』 (요시타케 신스케, 주니어김영사, 2019)  ⓒ최서영



아마 나보다 더 깊이 배우고, 오랫동안 많은 변수 앞에 현실과 타협했던 문화예술교육자들은 어쩌면 상상하는 기쁨을 잃고 시련 앞에 그을린 시간을 쉽게 내어줬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노고가 수포로 가지 않기 위해 시간이 갈수록 문화예술교육은 과거보다 훨씬 촘촘하고 화려해지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너무나 잘 짜인 현장에서 기획자와 교육자는 지쳤고, 참여자들은 상상력을 동원할 여유가 없어 만족을 평가하는 감시자가 되었다. 그러니 너무 완벽하게 준비하려 애태우거나, 부족하다며 사라지지 말자. 조금은 불편한 문화예술교육의 현장에서 참여자들은 자신의 문제를 뚫고 돌파하는 힘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온전하지 못한 문화예술교육 현장의 틈을 파고들어 역할이 주어진 참여자들은 그 순간부터 현장을 완성해가는 기회를 얻는다. 그렇게 되면 참여자와 교육자의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오직 문화예술을 함께 감각하고 실현하려는 유대감만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까 변수가 많은 문화예술교육현장에서 시련이 오더라도 멈추지 말자. 분명, 멈추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닐 테다. 문화예술교육자가 시련 앞에서 주저앉지 않는 상상력을 빚어낸다면, 여러 위기에 직면한 지금의 세대가 상상하는 힘을 잉태하여, 힘든 현실을 돌파하고 마침내 긍정하는 삶을 낳을 수 있다. 눈을 감고 ‘그것만 있을 리가 없어’라고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다 보면, 잔뜩 시달린 상상이라도 동화 같은 현실이 갈수록 견고해질 것이다.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 준비한 문화예술교육현장이 장마와 무더위가 시작되는 6월에 허탈한 재가 되지 않기 위해 상상하는 기쁨을 함께 되뇌고 싶다. 상상으로도 현실을 바꾸는 힘이 분명히 있다.


눈을 감고 ‘그것만 있을 리가 없어’라고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다 보면, 잔뜩 시달린 상상이라도 동화 같은 현실이 갈수록 견고해질 것이다. ⓒ 최서영




최서영 / 그림책 작가
쓸모없고, 잊혀가는 것들의 이야기를 쓰고 그립니다.
하얀구슬(2021), 환상항해(2023), 마늘꽃(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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